'어글리(ugly)' 바람은 패션계에서도 강력하게 분다. 1980년대 실리콘 밸리 기술자들이 썼을 법한 커다란 안경, 입술의 형태도 알아보기 어렵게 만드는 푸르거나 검은색 입술, 몸의 굴곡과는 전혀 따로 노는 괴상한 모양새의 의상….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한 스타일의 모델을 쇼 무대에 올리는 건 패션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였다. 룰을 깨는 게 패션의 기본 룰이요, 편견을 살짝 비틀어 유머를 주는 것이 요즘 시대의 패션이라지만 상식을 상당히 벗어난 듯한 기괴한 모습은 대중의 조롱거리가 되거나 비평가들의 뭇매를 맞기 쉬웠다. "저게 대체 패션 맞아?"류의 냉정한 한마디를 넘어 "애쓴다"는 비아냥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패션계에서 가장 입에 담지 못할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던 '어글리'. 유행에 뒤처져도, 시대를 너무 앞서가도 어글리란 단어가 족쇄처럼 따라붙었다. 패션 평론가들의 신랄한 이 한마디에 디자이너의 생명이 그대로 끝날 수도 있는 게 패션계의 룰이었다. 그랬던 어글리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극도의 아름다움'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어글리 시크(ugly chic)'. 패션계를 최근 지배하는 단어 중 하나다. 대놓고 못생김을 드러내는 발렌시아가의 '트리플 S 스니커즈'를 비롯해 루이비통, 구찌 등에서도 비슷한 '못남'을 발견할 수 있다. 발렌시아가와 베트멍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는 "전통적인 아름다움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명백한 것이기 때문에 어글리가 그만큼 존귀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패션계에 '어글리 시크'의 선봉자로 꼽히는 프라다는 "아름다움에 대한 부르주아적 재해석에 빠져들 시간에 인간의 추함을 파고드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고무 슬리퍼로 유명한 '크록스'를 우악스러운 화려함으로 치장해 화제가 됐던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케인은 "신이 아닌 이상 누가 옳고 그름을, 아름다움과 추함을 결정하는가. 그럴 주제가 안 되면 입이나 다물고 있어라"고 말했다.
일부에선 이미지가 우선되는 인스타그램 시대에 어글리는 시선을 끌기 가장 적당한 도구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어글리가 요즘 세대 입맛을 위한 도구라고 보는 건 현상의 단면만을 읽는 것이다.
퓰리처상 비평부문 수상자인 저널리스트 로빈 기반(Givhan)이 지난 1996년 워싱턴 포스트지에 '어글리의 시대가 왔다(Ugly is in)'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당시 패션계에 등장한 몇몇 의상을 두고 뉴욕의 유명 유통 전문가들이 "가난에 찌든 제3세계에나 줘 버릴 법한 거적때기"라는 비난을 쏟아낸 데에 대한 반박이었다. 기반은 "점점 극심해지는 부의 양극화, 불안한 미래에 대해 좌절감이 깃든 청년 세대, 정치적인 불안이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줬다"며 "사회상을 반영하면서도 있는 자들의 거만함을 비웃고 꼬집기 위해 '어글리 시크'는 탄생했다"고 분석했다. 그의 해석은 마치 요즘 신문을 읽는 듯하다. 요즘 스타일면 어느 쪽에 그대로 옮겨놓아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도 완벽히 맞아떨어질 것 같으니 말이다.
패션계에선 어글리에 대한 찬사와 아름다움에 대한 전복적 해석의 기원을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 예술계에 등장한 반문명, 반합리주의 운동인 다다이즘에서 찾는다. 1918년 '다다 선언'을 발표한 시인 트리스탄 차라는 "아름다움은 지루한 종류의 완벽함이자 황금 늪에 고여 있는 썩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그는 기성세대에 '아니요'라고 말하고 다름을 향해 달려가면서, 추함 속에 숨은 아름다움을 찾아갔다. 당시 큰 반향이 일었지만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는 비난에 어느새 사그라졌던 다다 정신이 21세기 '어글리'라는 직설적인 단어를 갈아입고 재현되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어글리 시크는 새로운 미학적 정의를 싣고 마치 폭주하는 특급 기관차같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