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됐던 폐공장에서 경쾌한 재즈 음악이 흘렀다. 거대한 기계가 있던 자리엔 현대 미술 작품이 걸려 있었다. 얼룩지고 빛바랜 시멘트벽을 배경 삼아 화려한 빔프로젝터 영상 쇼도 펼쳐졌다. 지난달 23일 전북 전주시 팔복동에 문을 연 '팔복 예술공장'. 30년 가까이 도심 속 흉물 취급을 받던 이곳이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한 모습을 보기 위해 1000여명의 시민이 몰렸다. 김수현(35·완주)씨는 "허름한 겉모습과는 달리 안에선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지는 반전 매력이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전주 관광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동안 전주 관광의 일반 패턴은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콩나물국밥 한 그릇 먹고 떠나는 것이었다. 이제는 도시 재생 사업으로 새롭게 태어난 문화예술공간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쇠락한 지역에 문화예술을 이식해 팔복 예술공장, 서학동 예술마을 등의 관광지를 만들었다. 시는 앞으로 팔복 예술공장과 같은 거점 관광지 3~4곳을 더 만들 계획이다.
◇흉물서 랜드마크 된 팔복 예술공장
영상·설치·회화 작품이 곳곳에 걸린 팔복 예술공장은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이었다. ㈜쏘렉스가 1979년부터 가동을 시작해 1991년까지 운영했다. CD(Compact Disc) 등 새로운 기록매체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폐공장에 활력이 돌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6년. 전주시와 전주문화재단이 문화 재생 사업을 추진하면서다.
전주시는 팔복 예술공장을 만들면서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을 롤모델로 삼았다. 20년간 버려진 화력 발전소(뱅크사이드 발전소)를 리모델링 한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Tate Modern)은 뉴욕 MoMA(뉴욕 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와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흉물로 방치돼 있던 화력발전소가 한 해 500만 명이 찾는 영국의 명소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애초 유명 건축가들은 발전소를 허물고 새 건물을 짓자고 제안했었다. 그러나 8년여간의 공사를 거쳐, 뱅크사이드 발전소는 화력 발전소의 상징인 99m짜리 굴뚝을 가진 세계 유일무이한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특히 굴뚝은 등대처럼 불빛을 낼 수 있도록 개조해, 테이트모던 앞에 있는 템즈강변을 비추도록 했다. 산업혁명 시대를 연상시키는 회갈색 벽돌 외벽도 그대로 뒀다.
팔복 예술공장도 최대한 원형 모습을 살렸다. 군데군데 검붉게 녹이 슬고 색이 바랜 건물 외벽에 철골 구조물을 덧댔다. 공장의 대형 철문을 잘라 만든 테이블이 곳곳에 놓였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1층이 아닌 2층에 창문을 낸 건축 구조도 인상적이다. 공장의 상징인 25m 높이의 굴뚝엔 '(株) 쏘렉스'라는 빛바랜 글자가 향수를 자극한다.
팔복 예술공장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뉜다. '예술창작공간'인 1단지는 창작스튜디오·전시장·연구실·커피숍·옥상놀이터로 꾸몄다. 창작스튜디오에선 13명의 작가들이 상주하며 작품활동을 한다. 작가들은 관광객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시민과 관광객에게 예술 교육도 한다. 커피숍에서 일하는 직원은 인근 주민들이다. 전주시는 팔복 예술공장을 만들면서 지역민들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직원으로 채용했다. 커피숍 직원 이희정(56·전주 팔복동)씨는 "황량했던 공간에 명소가 생기고 주민들의 일자리도 만들어져 일거양득"이라고 말했다.
'예술교육공간'인 2단지는 10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공간은 예술 놀이터, 퓨처 랩 등의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1단지와 2단지를 잇는 구조물은 그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컨테이너 박스 7개를 개조해 만든 구름 다리 형태의 구조물을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했다. 삭막한 회색빛 공장 사이에서 강렬한 색감이 눈을 사로잡는다. 컨테이너엔 예술가들이 추천하는 책을 전시한 '백인의 서재'와 흑백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다.
팔복 예술공장에서 다음달 7일까지 'Transform:전환하다'라는 주제로 특별전도 열린다. 입주 작가를 포함해 26개 팀, 3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팔복 예술공장이 리모델링에 들어간 동안 운영했던 '창작예술학교 AA' 출신 예술인들의 작품과 이번 행사에 특별 초대된 박재연·배병희·한정무 작가 등의 작품이 전시된다. 주민들이 팔복 예술공장을 중심으로 주변 건물과 이웃의 집을 기록한 지도와 장소를 담은 사진도 걸렸다.
황순우 팔복 예술공장 총괄감독은 "낙후된 지역을 공동체 중심의 문화재생을 통해 예술공간으로 꾸민 모범적인 사례"라며 "팔복 예술공장이 전주를 넘어 대한민국 명소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예술로 부활한 마을
전주 한옥마을에서 전주천을 두고 마주한 '서학동 예술마을'은 숨은 명소다. 서학동 일대는 전주에서 낙후된 지역에 속했으나, 2010년부터 예술인들이 하나둘씩 모여 살면서 아기자기한 예술촌으로 변신했다. 정미소 시리즈로 명성을 얻은 사진가 김지연씨가 운영하는 '서학동 사진관'이 터줏대감. 김지연씨는 한옥 살림집을 고쳐 전시 공간을 만들었다. 서까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살린 천장과 나무기둥에서 은은한 멋이 풍긴다. 사무실 공간은 세미나 공간이나 교류전 숙박시설로도 활용되고 카페에서는 작품사진 판매도 이루어진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조그만 마당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전주시는 오는 2022년까지 국비 100억원 등 총 169억원을 투입해 서학동 예술마을을 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자만마을'은 한국 전쟁 때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달동네다. 지난 2012년 자만마을 공동체 대표 권경섭(39)씨와 주민, 청년 예술가들이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주택 40여채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관광명소가 됐다. 이곳엔 꽃을 주제로 한 동화, 풍경 등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벽화들이 있다. 자만마을은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한옥마을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으며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식당 등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있다. 30분 정도면 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전주 한옥마을 오목대 인근에 있는 육교를 건너면 바로 자만마을이 나오고, 버스를 이용할 경우 전주 기린대로 한벽루 정류장에서 내려 3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국전통문화전당 전주홍보관 (063)281-1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