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나와”
2016년 5월.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 지역 주민들이 여교사를 성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피해 여교사는 친구들과의 여행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관사로 복귀하다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했다.
여교사는 주민들이 억지로 먹인 술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가 쓰러진 틈을 타 남성 3명이 10여분 간격으로 돌아가며 차례로 성폭행을 시도했다. 범행에 가담한 이는 학부모 박모(50)씨, 김모(39)씨와 주민 이모(35)씨였다. 범행 중에는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이가 먼저 들어간 공범에게 빨리 나오라며 재촉하기도 했다.
여교사는 이 사건으로 1년 이상의 치료가 필요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상해를 입었다.
◇저녁 해결하러 식당 들렀다가 술 '강권'…도수 40도 넘는 술 10잔 마셔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육지에 나갔던 피해 여교사는 5월 21일 토요일 오후 6시 마지막 여객선을 타고 흑산도에 돌아왔다. 여교사는 동료 교사들과 일요일 홍도 여행을 계획했지만 표를 구하지 못해 일찍 복귀했다고 한다. 섬으로 돌아온 그는 관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녁식사를 해결하려고 선착장 인근에 있는 박씨의 식당에 들렀다.
박씨는 다른 일행들과 술자리를 갖고 있다가 혼자 식사를 하러 온 여교사에게 접근해 술을 권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던 여교사는 이를 거절했지만 박씨는 주변 지인들까지 동원해 재차 술을 권했다. 공범인 김씨와 이씨도 술자리에 합석하고 있었다.
여교사는 계속 거절할 수 없어 결국 한 두 잔 받아 마셨다. 당시 그는 갓 교사로 부임한 20대 새내기 교사였다. 사건이 발생하기 2개월 전인 2016년 3월 신안군에 발령났다. 성폭행을 저지른 3명은 평소 ‘호형호제’ 할만큼 친분이 두터웠다. 박씨와 이씨는 서로 삼촌, 조카라 부르는 사이었고, 김씨도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술자리가 계속됐고 박씨는 알코올 도수가 40도 가량 되는 인삼주를 가지고 나왔다. 여교사는 박씨 등이 건네는 인삼주를 10잔 넘게 마셨고, 결국 식당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술자리는 1시간 가량 더 이어졌다. 밤 11시쯤 돼서 박씨가 여교사를 자신의 차에 태워 관사로 데려갔다.
◇두 차례 걸쳐 성폭행…1차 실패하자 1시간 뒤 재시도
사건은 박씨가 여교사를 관사에 데려간 이후 발생했다. 평일에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생활하는 관사였지만 주말이라 모두 외박을 나간 상태였다. 21일 자정 기준 앞뒤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범행은 21일 저녁 박씨 등이 여교사를 성폭행하려 시도한 것이다. 11시 15분쯤 박씨가 가장 먼저 관사에 들어가 성폭행하려 했지만 여교사가 완강히 저항해 범행은 미수(未遂)에 그쳤다. 이어서 이씨가 11시 30분쯤, 김씨가 11시 45분쯤 관사에 들어가 성폭행을 시도했고 모두 실패했다. 당시 범행 현장에서는 “빨리 나오라” 등의 대화가 오간 것으로 조사됐다.
박씨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한 시간쯤 기다리다 이튿날 새벽 여교사를 차례로 성폭행했다. 22일 새벽 1시쯤 여교사가 완전히 잠들어 무방비상태에 이르자 이씨가 먼저 성폭행을 저질렀다. 뒤이어 1시 50분쯤 김씨도 관사에 들어가 여교사를 성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여교사의 신체를 휴대폰으로 촬영하기도 했다.
이들 3명은 모두 술에 취한 여교사를 챙겨주기 위해 각각 따로 관사로 갔다가 벌어진 ‘우발적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과정에서 사전에 범행을 모의한 정황이 나왔다. 경찰이 술자리가 있었던 식당과 학교 관사 사이에 설치된 CC(폐쇄회로)TV 2대를 분석해보니 이들이 모는 차량 3대가 범행 시간대에 범행이 벌어진 관사 주변에 모인 것이다.
CCTV 화면에는 차량 두 대가 30초 간격으로 관사 주변에 멈췄고 20여분 뒤 마지막에 도착한 김씨 차량도 같은 장소에 들어오는 모습이 잡혔다. 차량 3대는 같은 장소에 10여분간 모여 있었다.
또 범행 시간대에 박씨와 김씨가 총 6차례 통화 시도 끝에 2차례 통화한 사실도 확인됐다. 여교사는 경찰에서 “박씨 차를 타고 관사로 이동하기 전 박씨와 이씨가 차 밖에서 뭐라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김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2007년 대전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성폭행 사건의 범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의 DNA가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용의자의 DNA와 일치한다는 분석 결과가 나온 것이다.
◇공모 여부가 양형 좌우…1·2심 인정 안했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여교사는 새벽 2시쯤 정신이 들어 경찰에 신고했다. 그는 오전까지 몸을 씻지 않은 채 기다리다 DNA 채증을 받았다. 범행 장소에 있던 이불과 그가 입었던 속옷을 증거로 제출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약 2주일이 지난 2016년 6월 4일 가해자 3명이 구속됐다. 이어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은 6월 29일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같은해 9월 26일 ‘성범죄에 대한 엄벌이 필요하다’며 박씨, 이씨, 김씨에게 각각 17년, 22년, 25년의 징역형을 구형했다. 김씨의 경우 여교사 성폭행 사건 외에 대전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의 범행 혐의가 추가돼 가장 무거운 형량이 구형됐다. 박씨는 성폭행 범행이 미수에 그친 점 등을 참작해 구형량이 가장 적었다.
재판에서는 이들의 공모 여부가 형량을 좌우하는 주요 기준이 됐다. 공모한 사실이 인정되면 각자의 성폭행 미수 범행에 대해 공동책임을 지게 되지만, 인정 안 되면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만 벌을 받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 1심을 맡은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범행을 공모하고 피해자 주거에 침입한 뒤 반항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성폭행해 죄질이 불량하다”며 박씨에게 징역 12년, 이씨, 김씨에게 각각 징역 13년, 18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2차 범행에 대해서만 공모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미수에 그친 1차 범행에 대해선 공모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항소심을 맡은 광주고법은 2017년 4월 열린 2심에서 1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다만 김씨 등이 피해자와 합의한 점 등을 감안해 박씨에게 징역 7년, 이씨 8년, 김씨 7년으로 감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원심 판결을 깨고 1차 범행에도 공모 관계가 있다며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씨와 이씨, 박씨 사이가 성폭행 범행을 전후로 명시적·묵시적 합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원은 “원심은 피해자를 관사로 데리고 간 피고인에 대해 다른 피고인들이 ‘빨리 나오라’라고 말하는 등 범행을 중지하게 한 행위에 대해 범행을 공모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간음 행위를 제지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자신의 범행을 위해 재촉한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판단했다.
이어 “범행을 우선적으로 저지른 피고인은 다른 피고인의 재촉에 따라 자신의 범행을 멈추고 (다른 피고인이) 간음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상태에서 관사 밖으로 나와 식당쪽으로 내려갔다”며 “이후 나체상태의 피해자에 대한 2차 간음행위가 저질러진 것을 보면 피고인들 사이에서는 피해자를 간음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다시 재판한 광주고법은 대법원 판단을 쫓아 김씨 등에게 원심보다 무거운 징역 10~15년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평소 호형호제하며 친분관계가 두텁고, 범행 당시 수시로 전화통화를 하며 일사불란하게 관사에 갔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온 과정, 범행을 극구 부인하다가 명백한 증거가 드러날 때마다 진술을 뒤집는 태도 등에 비춰 함께 범행하기로 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했다.
파기환송심 선고 이후 가해자 3명 가운데 이씨와 박씨는 공모 여부를 부정하고 형량이 너무 높다며 상고장을 제출했다. 김씨는 상고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이들에게 징역 17~25년을 구형한 검찰도 상고하지 않았다.
이어서 4월 10일 대법원 3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재상고심 사건에서 김씨와 이씨, 박씨에 대해 각각 징역 15년, 12년,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피고인들의 준강간미수 범행에 대하여 상호 간에 공모 또는 합동 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며 상고를 기각, 원심판결을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