푯말도, 지키는 이도 없이 자유로운 관람 유도… '느림의 미학' 실천
숲속에 듬성듬성 서 있는 16개 동의 독립된 벽돌 미술관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은 노이스 홀츠하임에 위치한 독특한 개념의 미술관이다. 뒤셀도르프에서 기차로 20여 분 거리에 노이스 홀츠하임이 있다. 노이스 홀츠하임은 줄여서 노이스(Neuss)라고도 부른다. 전형적인 목가적 분위기의 시골 기차역에 내리니 인젤 홈브로이히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20분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한 벽돌 디자인의 버스 승차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조그맣게 써놓은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 표지판 달랑 하나가 길 안내의 전부였다.
붉은 벽돌의 자그마한 건물에 들어서면 한구석에 매표소가 보인다. 그러나 어디에도 푯말은 없었다. 그냥 직감으로 알 수가 있었다. 길을 잃어버려도 전혀 두려움이 없는 공간이며,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하는 장소다.
◇ 16개의 은밀한 미술관... ‘세계의 숨겨진 미술관 톱 10’에 올라
홈브로이히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1982년 라인-에르프트(Erft) 강에 둘러싸인 섬처럼 생긴 이 자리에 뒤셀도르프의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미술품 컬렉터인 칼 하인리히 뮐러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미술관을 지었다. 푯말도, 작품 설명도, 작가 이름도, 인공조명도, 건물 안을 지키는 사람조차도 없는 자유로운 감상이 가능하고 느림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는 미술관이다.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은 2004년 미술 전문지 ‘아트 뉴스’가 선정한 ‘세계의 숨겨진 미술관 톱 10’에 오를 만큼 일반에는 덜 알려졌지만 꼭 가봐야 할 미술관이다. 독일어로 인젤은 ‘섬’을 의미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강은 보이지 않았고 하천과 늪지만이 드물게 눈에 띈다. 뮐러는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수많은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약 2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대규모 미술관을 조성했다. 공간은 역사적인 지역, 늪지와 공원 지역, 정원으로 구분했고, 자연 그대로의 지역과 개발 지역이 서로 공생하며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했다. 조각가 에빈 헤리히와 건축가 아나톨 헤르츠펠트, 추상화가 고트하르트 그라우브너가 공동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미술관 건물은 조각 적인 개념으로 디자인되어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아무런 장식 없이 벽돌만을 사용한 소박한 건물들은 자연을 벗 삼아 마음에 평정을 주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가의 들꽃과 수풀로 무성한 자연과 소박한 파 벽돌의 갤러리는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야생의 마른 수풀과 늪지 사이로 듬성듬성 서 있는 16개의 미술관은 숲속에 감추어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드넓은 숲속에 숨어 있는 다음 갤러리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팻말만이 유일하게 있을 뿐. 기존의 미술관 개념을 벗어나 미술관이 갖는 문턱을 헐어버렸다.
◇ 작품 설명도, 안내도 없이... 오직 감각만으로 감상하라
미술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이해도가 전혀 필요 없이 자신만의 감각을 체험케 하는 것이야말로 이 미술관이 갖는 독특한 매력이다. 작품에 붙어 있는 설명을 해독하려는 어떠한 수고도 필요치 않은 홀가분한 공간들이 감상자를 기다리고 있다. 자연광에만 의존한 전시 공간은 인공조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빛의 변화에 따라 반응하는 작품에서 새로움을 발견케 했다. 작품의 이미지를 단정 지어주는 작품명과 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으므로 인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작품하고만 교감하고 소통할 뿐이다.
요셉 보이스 등 몇몇 거장의 작품들은 여느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을 때보다도 장소의 자유로운 특성으로 인해 작품 메시지가 더 강하게 전달됐다. 어떤 갤러리에서는 한 작가가 성악 발성법을 퍼포먼스하고 있었다. 미술관 안에 잔잔하게 울려 퍼진 소리의 공명은 그 공간을 더욱 편안하게 했다.
어느 건물은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빈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밖의 자연을 마냥 바라보았다. 그 건물이 조각이며 예술품이다. 또 다른 전시장에는 요셉 보이스, 슈비터스 등 독일 현대회화 거장들의 작품이 구석구석에 놓여 있었다. 페르시아 조각과 크메르 청동 조각, 아프리카 나무조각과 중국 당나라의 도자기 등이 시대나 주제에 상관없이 함께 전시되기도 했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마티스와 세잔의 작품, 자코메티의 조각과 드로잉, 렘브란트의 회화 등 진귀한 작품이 감시자도 없이 놓여 있었다.
값지고 귀한 작품들이 방치된 듯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경이롭고 부러웠다. 늪지와 수풀 사이로 배치된 조각들 사이로 알렉산더 칼더 특유의 선홍색 조각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자유분방하게 놓인 조각품들을 감상하며 산책하듯 오솔길을 따라 마음이 끌리는 건물에 들어가 편안하게 작품을 음미하며 이 건물, 저 건물을 기웃거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권위적이고 거대해지는 21세기의 현대미술관과는 전혀 다른 철학이 그곳에 있었다. 디지털이 범람한 이 시대에 가끔은 아날로그가 그립다.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이 바로 그 아날로그다. 그곳이야말로 힐링을 주는 휴식처요, 안식처였다.
◆ ‘미술품보다 미술관을 더 좋아하는’ 사진작가 고영애. 그는 오랫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촬영하고 글을 써왔다. ‘내가 사랑한 세계 현대미술관 60(헤이북스)’은 작가 고영애가 15년간 지구 한 바퀴를 돌 듯 북미에서 남미로,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옮겨가면서 12개국 27개 도시에서 찾은 매혹적인 현대미술관 60곳을 기록한 미술관 기행서다. 옛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테이트 모던부터 12개의 돛을 형상화한 최첨단 건축물인 루이비통 파운데이션까지, 책에 게재된 60곳 모두 건축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장소지만, 그중 하이라이트 20곳을 엄선해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