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욕망에 남자와 남자라는 금기(禁忌)가 덧씌워졌다. 1983년 이탈리아 여름 휴양 도시 리비에라에서 운명처럼 만난 두 사람. 둘은 동성애를 부끄러운 짓으로 치부하는 세상을 무시하며 여름을 즐겼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를테면 이런 것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영화의 제목이다. 영어 그대로에다, 쓸데없이 길고,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씨네큐브에 비치되어 있던 포스터를 보게 됐는데 정말이지 지루할 것만 같아 보였다. 푸른 배경에 아도니스풍 미청년 둘이 기대어 있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멋 부리지 않은 척 멋 부린 글씨로 쓰여 있는 포스터라니. '팬시하고, 감상적이고, 예쁘장한 청춘물이려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 영화의 배경이 이탈리아 북부라는 걸 알게 되었고, 감독이 루카 구아다니노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제임스 아이보리! 이 영감님이 각색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난 영화를 보러 뛰쳐나가고 있었다.

제임스 아이보리라니. 그는 내가 십대 때 비디오로 본 '전망 좋은 방'의 감독이었다. 나는 헬레나 본햄 카터가 창문을 있는 대로 열고 침대에 누워 보던 피렌체의 붉은 지붕들과 그녀의 견고해 보이는 광대뼈에 완전히 매혹되었었다. 그러고는 '제임스 아이보리'라는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이름을 각인시켜버렸다. 아이보리에게는 당시에도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데, 2018년에 그의 신작이 개봉되었다니 대체 이 사람은 몇 살이란 말이지?(1928년생, 90세였다.) 하여튼 정말 놀랍고도 가슴 뛰는 일이었다. 창작자가 된 다음 가장 우러르게 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은퇴를 발표했다 다시 신작을 들고 나타나는 일을 되풀이해 '번복의 아이콘'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나도 우습지 않다. 자신의 지력이 다했음을 알기에 은퇴를 선언했다 뜻밖에도 새 작품이 생산되면 체면 불고(不顧)하고 다시 나와 은퇴를 철회하는 사람을 어찌 비난할 수가 있을까.

아, 제목도 요상한 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는 내내 행복했다. 이탈리아 리비에라 해안의 어느 여름용 휴양 도시가 배경인 이 영화는 루카 구아다니노가 관능적이기로 작정하고 밀라노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아이 엠 러브'보다 훨씬 관능적이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일 것인데 내가 보아왔던 산과 물과는 다른, 축복받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여름의 그 색과 빛이라니. 일단 여기에 녹다운이 되었다. 매일같이 미세 먼지로 고통받으며 창문을 여는 행위가 더없이 귀한 일이 되어버린 나는 이탈리아 북부의 공기를 있는 힘껏 들이마셨던 것이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던 A에게 어느 날 아버지의 손님인 B가 나타난다. A는 여름마다 아버지의 손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B에게 자신의 방을 내줘야 하고, A와 B는 화장실을 공유하며 나란히 붙은 방에서 지낸다. A는 B에게 이끌리고, 고백하나 B는 A를 단념시키려 한다. 그러다 A와 B는 서로를 욕망하는 서로를 확인하게 되는데….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줄거리라면 줄거리다. 러브 스토리라니, 진부하다면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진부함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A와 B가 남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나치게 아름답기 때문에, 호모포비아라든가 하는 어떤 현실적인 위해도 이 영화에는 발붙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A는 엘리오, B는 올리버다. 엘리오는 교수 아버지와 여러 언어를 하는 어머니를 가졌고, 아침마다 이불을 정리해 주는 중년 여인과 마당에 있는 살구를 따주는 중년 남자로부터 보살핌을 받으며 TV가 없는 집에서 자라 교양마저 풍부한, 피아노를 치는 게 일인 17세 미소년이다. 올리버는 유럽인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미국인이 늘 그렇듯이 교양이 부족한 데가 있지만, 능력 있고 똑똑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활달한 매력이 넘치는 24세의 남자다. 이 두 미남자가 찬연한 배경 속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요산요수 아닌가. 한가로이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전시하는 이 둘, 그러면서 눈빛이 스치고 엇갈리는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새가 없었다.

각계각층,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찬탄을 이끌어내는 올리버의 매력은 너무 막강한 나머지 비현실적이어서 신화에서 빠져나온 인물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영화에서 묘사되는 매력적인 인물들이란 허술함을 통해 그 매력이 배가 되곤 했는데, 이 올리버는 한 톨의 허술함도 허용치 않은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아니, 어떻게 하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를 이론적으로 학습하고 실습을 통해 이론의 맹점을 보완한 단계에까지 이른, 바람둥이로 보였다. 나는 슬슬 기가 차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저러니 안 반하고 배겨?"라는 투의 대사를 기필코 누군가의 입을 빌려 하게 한 아이보리 영감님의 유머 코드가 적중, 내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이 올리버가 엘리오에게 바흐 연주를 부탁하는 장면도 굉장히 웃겼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기회! 엘리오는 자기가 얼마나 뛰어난 테크니션인지를 과시하기 위해, 그러니까 올리버를 사로잡기 위해 피아노 건반이 부서져라 피아노를 친다. 올리버는 그게 아니라고 얼굴을 찡그린다. 엘리오가 친 것은 리스트가 편곡한 바흐였고, 부소니가 편곡한 바흐였기에. 올리버가 원한 것은 바흐 그대로의 바흐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어떻게 각색했는지가 궁금해 이 영화의 원작을 샀다. '그해, 여름 손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원제는 영화 제목과 같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책을 다 읽고서, 이게 그 드물다는 원작에 꿀리지 않은 각색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설은 사랑에 빠진 엘리오의 감정을 주로 따라가기 때문에 사건도, 시간도, 공간도 분명하지 않다. 아이보리는 그것들에 질서를 부여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가 그의 손길에 극도로 당황한 이유는 처녀가 욕망의 대상이 자신을 처음 만졌을 때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 손길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익숙한 자위가 주는 쾌락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쾌락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런 소설의 문장을 영화 언어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올리버보다 덜 방탕하고 더 다정한 엘리오, 엘리오보다 덜 다정하고 더 방탕한 올리버는 결국 사랑에 빠진다. 욕망이 우선이었다. 명백히 욕망인 줄 알았다. 게다가 부끄러움을 동반한 욕망. 1983년 이탈리아에서 동성애라는 건 아주 부끄러운 일로 치부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들이 심하게 부끄러운 욕망을 넘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때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부른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었을 순간들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