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영화는 결국 스필버그라는 이름으로 수렴한다. 올해 일흔두 살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어느덧 블랙홀이 돼 버린 듯하다. 여러 장르를 남김없이 흡수하고 빨아들여 자신만의 우주를 완성해낸다. 별은 모양과 빛깔이 제각기 다르다. 최근 몇 년 사이 내놓은 영화들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링컨'(2012) '스파이 브릿지'(2015)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 '더 포스트'(2017)에 이르기까지 스릴러·코미디·시대극을 오가면서도 그는 종종 걸출한 작품을 빚어냈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스필버그의 새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바로 이런 스필버그만의 우주가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일흔두 살 노장은 이번엔 가상현실이라는 첨단 소재를 발판 삼았다. 어니스트 클라인이 쓴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현실은 빈민촌 이모 집에 얹혀사는 신세지만, 버려진 승합차 안에서 가상현실(VR) 세계‘오아시스’에 접속할 땐 모두가 주목하는 유명인이 되는 청년 웨이드(타이 셰리든).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이 영화의 리듬은 서커스 공연처럼 박진감 있다.

2045년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버스, 도시는 붕괴 직전이다. 인구가 폭발하면서 식량은 바닥났고 빈부 격차는 더 커졌다. 사람들은 잿빛 현실을 잊기 위해 게임에 매달린다. 3D 헤드셋을 쓰고 가상현실 '오아시스'에 접속한다. 그곳에선 뭐든 원하는 대로 변신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아시스'를 만든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가 죽으면서 사람들에게 가상현실 속에 숨겨둔 '이스터 에그'를 찾는 사람에게 오아시스 소유권과 그의 유산을 주겠다고 말한다. 1980년대 대중문화가 문제 풀이의 힌트가 될 거라고 귀띔하면서. 평범한 십대 소년 웨이드 와츠(타이 셰리든)가 뜻밖의 첫 승을 거둔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스필버그가 창조한 VR 게임 세계에 발을 들였음을 깨닫는다. 스크린엔 온통 인공적인 아바타와 게임 속 배경이 일렁인다. 차갑고 기계적인 화면에 멈칫하는 것도 잠시, 1980년대 음악이 붉은 주단처럼 깔리면 맥박은 다시 빠르게 요동친다. 반 헤일런 '점프(Jump)'가 울려 퍼질 때 머릿속에선 이미 가속 페달이 움직이고, 뉴 오더 '블루 먼데이'나 조지 마이클 '페이스', 비지스 '유 슈드 비 댄싱'이 튀어나올 땐 귓가에 폭죽이 터진다.

퍼즐을 주워 담는 쾌감도 만만치 않다. 숨은 대중문화 아이콘이 곳곳에 지뢰처럼 흩어져 있다. 게임 속 아바타가 뛰고 점프할 때 그 곁엔 영화 '쥬라기 공원' 속 티렉스와 '킹콩'의 고릴라가 몸을 날리며 건물을 때려 부순다. 일본 만화 '아키라'와 '건담',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와 '터미네이터' 이미지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 영화 '샤이닝' 패러디는 백미다. 이스터 에그를 찾아 헤매던 주인공들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홍수처럼 쏟아지는 핏물에 와락 휘말리는 장면에선 객석도 웃음과 흥분으로 우르르 흔들린다.

곡예 하듯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오감을 떨게 하는 140분이지만, 영화 마지막은 역시나 지극히 낭만적이고도 보수적인 스필버그적 세계관에 안착한다. 장벽을 넘고 기어 가상현실을 통과한 웨이드에게 제임스 할리데이가 들려준 말은 결국 이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잊지 마. 현실만이 진짜야!"

지난 2일까지 관객 106만1050여명을 동원했다.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