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한용섭 기자] 그러고 보니 벌써 9년이 지났다. 롯데 이대호는 2009년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운대'에 본인 역할로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다. 프로야구 선수 이대호.
주인공 설경구가 사직구장에 롯데를 응원하러 갔다가 술에 취해 이대호를 향해 조롱과 욕설을 내뱉는 장면. 관중석의 설경구는 삼진을 당하고 들어오는 이대호를 향해 "마, 이대호. 니 오늘 병살타 치러 왔나. 병살타 마이 치니까 배 부르나. XXXX야'처럼 인신공격까지 한다.
이에 이대호는 "니 딱 봐놨어. 니는 가도 죽고 안가도 죽어'라는 살벌한 사투리 대사로 응수했다. 영화라서 가능한, 영화였기에 누구나 보고 웃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카메오로 등장한 이대호는 찰진 대사와 함께 살아있는 표정 연기까지 보여줬다.
영화가 대성공한 후에 이대호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촬영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대호는 "대사를 할 때 NG 한 번 안 냈다"며 "설경구씨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술 취해서 내게 욕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정말 실제같이 욕을 하시더라. 듣다 보니까 화가 나더라"며 한번에 OK 사인을 받은 자신의 감정연기에 대해 너스레를 떨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대호는 지난 주말 사직구장 퇴근길에 '치킨 봉변'을 당했다. 롯데의 개막 7연패가 오롯이 이대호 잘못이겠냐 만은 삐뚤어진 팬심은 이대호를 향했다. 팬들의 실망감은 짐작되지만 과격했다. 도를 넘어 지나쳤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웅덩이를 흐렸다. 롯데팬 전체가 매도됐다.
'치킨 봉변'을 당했을 때, 이대호가 느꼈을 감정의 생채기는 어느 누구도 짐작하기 어렵다. 아무리 팬들의 사랑과 비난에 노출된 스타 선수라고 해도 패배에 대한 책임을 그런 식으로 감내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이대호의 자녀들도 성장해 자신들의 아빠가 바깥에서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일을 경험하는지 알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이대호 본인이 느낄 자괴감은 물론 가족에까지 상처를 줬다.
영화처럼 짜여진 각본대로 대사를 주고받아도 사람 감정은 순간적으로 상처받기 마련이다. 치킨을 던진 팬은 이미 사라졌고, 이대호는 영화에서처럼 속 시원하게 대차게 말대꾸도 할 수도 없는 처지다. 속으로 삭히는 수 밖에.
롯데는 1일 드디어 첫 승을 거두며 개막 7연패를 끊었다. 이대호를 비롯해 롯데 선수들은 조금은, 마음의 부담을 덜고 퇴근길에 나설 수 있었다. 사직구장 광장에 가득 모인 롯데 팬들은 퇴근길에 나선 선수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대호가 사직구장 정문을 나설 때는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이대호' 이름을 연호했다고. 이대호는 전날 마음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위로됐을지.
오늘은 프로야구 선수들이 쉬는(원정지로 이동하는) 월요일이다. 대전 한화 원정을 떠나는 이대호에게 숙소에서 '해운대' 영화 속에 나온 자신의 명연기로 자기 위안을 해보길 권한다.
/orange@osen.co.kr [사진] (위) 해운대 영화 촬영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