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람과 두 번 결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당신, 이번엔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 줘. 지난번엔 내 생각이 틀렸어. 이번엔 우리 이렇게 하자.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그 사람'과 '처음' 결혼합니다. 상대방을 잘 모르고, 나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결혼 생활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풍문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섣부른 계약과 맹세는 위험합니다. 결혼을 지탱하는 건 차라리 매일매일의 소통과 작은 양보들이 아닐까요?
홍여사 드림
누가 먼저 그런 얘기를 꺼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였을 수도 있고, 아내였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아직은 애인 사이였던 우리는 제법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혼전에 꼭 다짐받고 싶은 것 한 가지씩 말하기! 그때 제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아무리 크게 다투어도 '이혼' 소리 함부로 하지 않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 아내가 내놓은 '요구 조건'이 저한테는 좀 의외였습니다. 아내는 오래된 생각인 듯 딱 잘라 말하더군요. "대리 효도는 싫어. 효도는 셀프!"
저는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대리니 셀프니 하는 말이 우리 결혼과 무슨 상관이지? 하지만 효도라는 말을 가운데 끼워 넣고 보니 퍼즐이 맞아 들어가더군요. 거기다 아내의 부연 설명까지.
"오빠는 오빠 부모님을, 나는 내 부모님을 책임져야지, 상대방한테 떠넘기면 안 되잖아."
'대리 효도'라는 표현이 좀 생경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저는 그 말에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내 부모님의 일을 배우자에게 떠넘길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효도가 셀프다? 지금은 그게 가능할지 모르지만 훗날 부모님이 연로하여 자식 노릇이 버거워질 때면, 둘이 힘을 합쳐도 부족하지 않을지….
하지만 저는 그날 아내가 원하는 답을 주었습니다. 아내가 할 수 있다면 저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대리 효도는 안 시킨다, 효도는 셀프다, 약속했습니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 삼 년. 약속대로 아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부모님이 서운하게 느끼시지 않도록 저는 나름 신경을 썼습니다. 일단 저는 매일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장가보낸 빈 자리를 짧은 통화로 메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대화가 형식적인 것이 되지는 않도록 애썼죠.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지 않고, 일부러 묻고, 대답을 새겨들었습니다. 특히 퇴직 이후 감정 기복이 심한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어 드리는 것이 전화를 거는 주된 목적이었죠. 그런 얘기를 아들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좋아지시는 듯하니까요. 꼭 효도 때문만이 아니라 아내를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꼬박꼬박 전화를 드림으로써 아내는 자연히 전화 스트레스에서 면제되었지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내가 부모님과 직접 통화하는 일은 없습니다.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친정에 혼자 잘 다녀오듯, 저 역시 혼자 부모님 댁에 다녀오는 일을 어색해하지 않습니다. 대략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서 외식도 시켜 드리고, 장도 같이 봐 드립니다. 처음엔 부모님이 당황해하며, 혼자 올 거면 굳이 안 와도 된다고 말리셨지만, 나중엔 적응하시더군요. 대리 효도니 셀프 효도니 그런 말은 모르시지만, 신세대 아들 며느리가 원하는 바가 뭔지는 감을 잡으신 모양입니다. 어떤 일에도 굳이 며느리 찾지 않으시고, 저 혼자 하는 효도도 기꺼워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 만족하고, 자부심마저 느낍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점이 우선 뿌듯하고, 부모님과도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딸이 없는 부모님이 아내에게 부담 주지 않게 하려고, 제가 딸 노릇을 자청하는 동안, 특히 어머니와 친밀감이 커졌습니다. 옷이나 화장품은 골라 드리지 못해도, 뮤지컬 티켓 같은 건 제가 곧잘 구해 드립니다.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하셨다는 발레 공연에는 직접 모시고 가기도 했죠. 오직 가성비만으로 식당을 고르는 아버지 대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드리기도 하고요.
어머니는 요즘 그런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장가가더니 철들었다고, 며느리를 잘 들인 것 같다고요. 그쯤 되면 윈윈의 결과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요? 아내에게 칭찬의 말을 들을 만하지 않나요?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를 대하는 아내의 표정에는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저를 툭툭 건드리기도 합니다. 대단하다 정말. 어련하실까? 진심, 존경스러워! 물론 아내는 비꼬는 게 절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서 존경스럽다고 하는 것뿐이랍니다. 부모님에 대한 저의 '대단한' 효심을 자기는 흉내조차 낼 수 없답니다. 특히 어머니와의 애착은 웬만한 모녀간 이상이라며, 자기는 친정 엄마 하소연을 오 분도 못 들어준답니다. 엄마하고 친하게 지내는 비결을 저한테 배워야겠다고 합니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말은 진심이라고 하는데, 얼굴은 굳어 있습니다. 비꼬는 게 아니라는데 입술은 비틀려 있습니다. 아내가 바라는 건 뭘까요? 대리 효도시키지 말라기에 아내에게 효도 불똥이 튀지 않게 노력했습니다. 효도는 셀프라기에, 제 선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아내는 딴소리합니다. 제 효도가 과하다고, 잘못되었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은 이런 말까지 합니다. 오빠 머릿속이 꽉 차 있어 아이가 들어갈 공간이 없기에,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답니다. 내 머릿속에 뭐가 꽉 차 있는데, 물으니 아내는 말하네요. 알잖아~. 화가 나더군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퍼붓는 모순된 말. 난, 완전히 소외된 기분이야. 이 집에서 난 뭐야? 그리고 오빠, 그렇게 자상한 사람이 우리 부모님한테는 어쩌면 그렇게 무심해…. 어쩌면?
셀프 효도라는 이름으로 애초에 아내가 바랐던 게 뭐였을까 싶습니다. 며느리의 부담을 벗되, 남편 역시 시부모님께 적당히 소홀하기를 바란 걸까요? 그럴 줄만 알았던 걸까요? 그렇다면 그게 어떻게 셀프 효도인가요. 셀프 불효라고 해야 맞지.
셀프라는 말을 '스스로 알아서 척척'이라고만 이해한 제가 너무 순진한 건가요?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