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인' '밀라노 아웃'으로 된 한 달 일정 항공권을 끊었다. 석 달 전 일이다. 이탈리아에 가자는 것과 언제 로마로 들어가 언제 밀라노로 나오자는 것 말고는 정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맴돌던 신비스러운 지명인 비첸차, 리미니, 파도바, 라벤나, 토리노, 아스콜리피체노 등등을 생각하다 말다 했을 뿐이다. 그러다 일주일 전 일정을 확정하고 숙소를 모두 예약했다. 로마에서 아시시를 거쳐 피렌체로 갔다 볼로냐에 머물다 토리노로 갔다 밀라노에서 여정을 끝내기로. 이탈리아를 가는 사람들이 짤 만한 보편적 경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게 있다면 토리노가 포함되었고, 토리노에서 머무는 날이 밀라노보다 훨씬 많다는 것일 거다. 나는 토리노 숙박에 로마와 피렌체만큼이나 되는 무려 일주일을 할당했다.
그렇다. 비첸차, 리미니, 파도바, 라벤나, 아스콜리피체노를 제치고 토리노가 살아남은 것이다. 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딱히 토리노의 어디가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뭐랄까 '토리노'라는 발음과 아슴푸레한 분위기가 날 이끌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러니까 '토리노에는 뭔가 있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니체가 미쳐버린 도시라는 것(니체는 한 상인이 말에 채찍을 때리는 걸 보고 울부짖다 기절하고 미쳐버린다), 프리모 레비(1919~1987)가 자살한 곳이라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으면서.
서경식의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을 읽은 것도 이 토리노 때문이었다. 이 책은 7장으로 되어 있는데 무려 토리노가 두 장(章)을 차지하고 있다(장의 제목이 '로마1', '로마2' '페라라' 이런 식이다.) 두 장이 할당되어 있는 다른 도시는 로마밖에 없고, 피렌체는 목차에 아예 없다. 나는 이 책이 '근거 없는 토리노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는 내게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았다.
174517. 이것은 프리모 레비의 왼쪽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간수가 문신으로 새긴 죄수 번호. 그렇다. 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이었고, 아우슈비츠의 그 드물다는 생존자였다. 그는 수용소의 경험을 글로 써서 발표했다. 나는 수용소의 참혹한 체험을 쓰면서도 늘 유머를 잃지 않는 레비의 글을 읽으며 극한을 경험하면 더 강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인간도 있다는 기이한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했다. 더 기이한 것은 이런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유대인을 모조리 말살하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곳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돌아온 인간이, 그래서 그 무엇도 망가뜨릴 수 없는 인간의 품위를 글로써 증명했던 인간이, 왜? 대체 왜? 자살했느냐는 거다.
"프리모 레비는 늘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했는데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했어요. 결코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담당 편집자가 저자에게 증언한 것이다. 담당 편집자는 레비를 힘들게 한 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였다고 말한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일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벌이는 게 아니냐고 프리모 레비는 우려했다. 유대인 사회는 유대인인 레비가 감히 이스라엘에 반하는 생각을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토리노에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체사레 파베세(1908~1950)도 있었다. 그도 토리노에서 자살했다. 전후 우울감을 이기지 못했다는 게 정설이라면 정설인데 정말 그랬던 건지는 알 수 없다. "파베세는 우리 모두가 토리노를 비운 어느 여름에 자살했다. 그는 마치 산책 코스나 파티 계획을 세우는 사람처럼 자신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상황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계산했다. (…) 몇 년 전부터 늘 자살하겠다고 이야기했으므로 누구도 그 말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가족어 사전'을 쓴 소설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증언이다. 친구들이 파베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은 파베세가 누구보다도 전쟁이 다시 벌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또 토리노에는 에이나우디 출판사가 있다. 체사레 파베세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이 출판사에서 동료로 일했고, 이 출판사에서 자신들의 책을 펴냈다. 에이나우디에서는 프리모 레비의 책도 펴냈다. 이 출판사가 있다는 '레 움베르토 거리 Corso Re Umberto'를 구글 지도에서 더듬어본다. 이 거리에 있다는 에이나우디 서점도 찾아본다. 체사레 파베세가 자살한 호텔이 있던 '로마 거리 Via Roma'도, 이 도시의 주도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대로 Corso Vittorio EmanueleⅡ'도.
또 카페 바라티가 있다! "나는 레 움베르토 거리에 있는 그 출판사를 사랑했다. 몇 미터만 가면 카페 바라티가 있고, 예전에 발보 부부가 살았던 집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리고 파베세가 죽은 아케이드 아래 그 호텔에서도 겨우 몇 미터밖에 되지 않던 에이나우디 출판사를"이라는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육성을 서경식이 옮겨 놓았다. 서경식은 이 카페 바라티를 방문하면서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사탕에 대해 이야기한다. 토레스는 쿠바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은 설치 미술가다. 몰년은 1996년. 죽고 나서 훨씬 유명해졌다. 저자는 1997년 하노버의 한 미술관에서 본 토레스의 전시를 본 기억을 되살린다. 모래나 자갈을 쌓아놓은 것처럼 사탕을 쌓아 놓은 그 전시에 대해 말하고는 사탕 껍질에 쓰여 있던 'Baratti'가 바로 이 바라티 카페에서 만든 것이라고.
아하! 나는 200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토레스의 그 사탕으로 된 설치를 본 적이 있다. 토레스는 그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미국관 작가였다. 그때의 사탕 껍질은 투명한 아크릴이었고 사탕은 검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억은 그런데, 어쩌면 그 투명 포장지에 'Baratti'라는 글자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 사탕을 관객이 집어 가게 하는 게 그 전시의 의도였다. 베네치아에서 나는 그 사탕을 주머니 두 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만큼 집었다. 애석하게도 그 사탕의 맛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탕 더미를 보았던 순간의 당혹스러움과 사탕을 집어가라는 누군가의 말에 멈칫했던 몸의 느낌과 이윽고 용기를 내 사탕을 꾸역꾸역 주머니에 넣었던 손맛은 아직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