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비닐 바지'가 돌아왔다, 하이패션으로 부상한 비닐 패션
투명한 PVC 소재로 경쾌해진 명품… 가격 논란은 여전
1994년 ‘날 떠나지 마’로 데뷔한 가수 박진영은 ‘비닐 바지’를 입고 전설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지금, 투명한 비닐(PVC·폴리염화비닐) 소재가 하이패션으로 당당히 부상했다. 올봄 많은 브랜드가 비닐로 만든 다양한 패션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일회용 싸구려 소재로 외면받던 비닐은 매끈한 광택과 투명함으로 거리를 장식할 태세다.
◇ 일회용 비닐봉지가 명품 가방으로, 비닐의 신분 상승
빵집이나 잡화점에서 물건을 사면 주는 투명한 비닐 쇼핑백, 이젠 함부로 버려선 안 된다. 가죽 가방보다 비닐봉지가 멋져 보이는 시대가 열렸으니. 비닐 쇼핑백은 셀린, 발렌티노, 샤넬의 패션쇼를 거쳐 올봄 가장 뜨거운 액세서리가 됐다.
셀린은 590달러(약 63만원)짜리 비닐 쇼핑백을 출시했다. 양가죽 지갑과 세트로 구성된 제품으로, 속이 비치는 투명한 재질에 셀린 로고가 새겨져 있다. 아래에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로 ‘어린이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두라’는 경고 문구가 쓰여 있다. 라프시몬스는 베를린 쇼핑몰 Voo와 협업으로 RS쇼핑백이란 이름의 비닐 가방을 내놨다. 2mm 두께의 비닐 쇼핑백에 2017 가을/겨울 패션쇼에 등장한 그래픽이 들어가 있다. 까만 더스트백을 포함한 이 가방의 가격은 148유로(약 19만원)다.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를 닮은 투명한 PVC 하이힐도 등장했다. 크리스티앙 루부탱은 투명한 유리구두에 크리스털을 뿌려놓은 듯한 디자인의 하이힐을 출시했다. 지미추는 오프화이트와 협업해 10cm 굽의 까만 하이힐을 비닐로 감싼 형태의 독특한 신발을 내놨다. 저런 걸 누가 신을까 싶겠지만, 팝가수 리한나가 착용하면서 사전 예약 물량이 모두 완판됐다.
◇ 맑은 날에 더 빛나는 비닐 패션… 샤넬·버버리도 합류
비닐의 유행은 액세서리로 끝나지 않는다. 샤넬은 올봄 의류와 가방, 신발까지 비닐을 사용해 비닐 패션의 정점을 찍었다. 샤넬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트위드 재킷 위에 다양한 길이의 PVC 케이프(cape·소매가 없는 망토식의 겉옷)를 걸쳐 변화를 줬다. 샤넬 측은 이 케이프를 두고 ‘무지갯빛 드레스를 비로부터 보호해주는 필수 계절 아이템’이라 소개했다. 허벅지까지 오는 투명한 비닐 사이하이 부츠와 버킷햇, PVC 가방도 다양하게 내놨다.
버버리는 브랜드의 유산인 트렌치코트를 재해석해 비닐 트렌치코트를 선보였다. 안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소재부터 반투명 소재, 점무늬와 레이스, 체크 문양이 들어간 소재까지 다양한 PVC 코트를 출시했다. 클래식함의 대명사였던 트렌치코트는 PVC를 만나 날렵하고 경쾌하게 재탄생했다.
모스키노는 발칙한 디자인의 비닐 옷을 700달러(약 75만원)에 출시해 논란을 일으켰다. 세탁소 비닐 커버를 연상시키는 형태에 ‘WE LOVE OUR CUSTOMERS(우리는 고객을 사랑합니다)’라는 문구가 실소를 자아낸다. 영국 패스트 패션 업체 톱숍은 지난해 비닐 바지를 100달러(약 11만원)에 선보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박진영의 ‘그 바지’와 비슷하다. 과연 이 옷을 누가 입을까 싶겠지만, 놀랍게도 출시와 동시에 완판됐다. 이에 대해 톱숍은 “틀을 깨부숴야 진정한 패션 피플이 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 고급스러움보다 참신함 드러내는 ‘안티 럭셔리’ 트렌드
안티 럭셔리 트렌드는 지난 몇 시즌 동안 지속하고 있는 패션 트렌드다. 디자이너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일상적인 디자인을 럭셔리 제품으로 만들고 있다. 발렌시아가의 이케아 쇼핑백과 베트멍의 그물 가방 등 요즘 잘 나가는 명품들은 고급스러움보다 참신함을 드러낸다. 비닐 역시 참신함의 표현으로 선택됐다. 박진영이 한 방송에서 과거 비닐 바지를 입은 이유를 “반발심 때문”이라 설명했듯 비닐은 소재 자체만으로 신선하고 파격적이다. 세탁할 필요 없이 젖은 수건으로 쓱 닦으면 되는 편리한 관리법도 장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참신함은 논란을 동반한다. 재룟값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제품 가격 때문이다. 명품 비닐 가방에 대해 한 대학생은 “이름값이 뭐라고 그렇게 비싸게 파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방 청소하다 버려도 할 말 없는 비닐봉지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반면 여성복 디자이너 정승현 씨는 “무심하게 든 비닐봉지가 고급스러운 옷과 대조돼 멋져 보인다. 명품을 사는 건 부담스러우니, 집에 돌아다니는 비닐봉지를 들고 다녀야겠다”라고 말했다.
유행의 최전선으로 부상한 비닐 패션. 실생활에서 즐기고 싶다면, PVC 소재의 투명한 파우치나 가방 등을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내부가 지저분해 보이지 않도록 가방에 넣는 소품들도 신경 쓸 것. 의류와 신발의 경우 안에 컬러풀한 셔츠나 양말을 매치하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단, 내부에 습기가 차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으니 통풍 구멍이 있는지 꼭 확인하고 구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