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하는 중인 거야." 주인공 미소(이솜)가 나긋하게 대꾸하자 "딱히 오갈 데 없으면 그냥 나랑 결혼하는 게 어떠냐"던 선배 표정도 슬쩍 머쓱해진다. 오는 22일 개봉하는 영화 '소공녀(감독 전고운)'는 매일 아침 빨아 말끔하게 다려 입는 빳빳한 단벌 셔츠를 떠올리게 한다. 가난하지만 남루하지 않고 오갈 곳 없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기어코 돋아나는 풀꽃처럼 영화는 대책 없이 산뜻하고 파릇하다.

미소는 집세가 너무 오르자 친구네 집들을 전전하며 지낸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미소는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나서 3년째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30대 아가씨다. 하루 4만5000원씩 벌어 집세며 생활비까지 충당하기 쉽지 않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하루가 저물 무렵 마시는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개비, 남자 친구 한솔(안재홍) 어깨에 기대는 시간만 있다면 별로 바랄 게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집세는 그러나 갈수록 오르고, 담뱃값과 위스키 가격도 자꾸만 뛴다. 미소는 결국 집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생각한다.

미국 아동문학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이 1905년에 쓴 소설 '소공녀(小公女)' 주인공 세라는 아버지가 실종되자 하녀가 되지만 끝까지 우아하게 살아간다. 이 영화 주인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집이 없어 친구네를 떠돌지만 남의 집에 갈 때 계란 한 판 정도는 사 들고 가는 예의를 지킨다. 얹혀 자는 대신 친구네 집을 쓸고 닦고 나온다. 집 있는 친구라고 삶이 더 나은 건 아니다. 어떤 이는 링거 맞아가며 회사에 다니고, 어떤 이는 시부모와 남편 구박을 견디며 산다. 미소는 그들에게 뜨끈한 밥을 지어 먹이고 때론 울 수 있는 어깨를 빌려준다.

영화 보는 입장에선 궁금하기도 하다. 왜 집세 낼 돈도 없으면서 술·담배를 끊지 않을까. 미소는 그 질문에 이렇게 받아친다. "집이 없긴 하지만 취향과 생각까지 없는 건 아니거든." 대책 없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미소의 삶이 너무나 성실하고 굳세다. '쟤는 어쩌려고 저러나' 하고 팔짱 끼고 보던 이조차 영화 끝날 무렵엔 그녀 나름의 방식에 납득되고 만다. 우아한 생존이란 고통스럽지만 때론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영화 영어 제목은 '마이크로해비타트(Microhabitat)'다. 아주 작은 거처라는 뜻이다. 주인공 이름은 그래서 미소(微笑)일 수도 있고 미소(微小)일 수도 있다. 영화 마지막쯤 미소가 어디에서 누구와 지내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걱정되지는 않는다. 쌀, 별, 눈송이, 미소…. 눈물겹도록 작고 따뜻한 것이 있기에 우리가 숨 쉰다는 것 또한 알게 됐기 때문이다.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