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었던 지난 9일 오후 5시쯤 국민연금공단이 인사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자료엔 달랑 '감사 이춘구'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력이나 배경 설명은 한 줄도 없었다. 홍보실에 물어보니 자신들도 방송사(KBS) 출신이라는 정도밖엔 모른다고 했다.
이 인사가 근무했던 방송사 사람들도 "국제부 등에서 주로 근무했던 양반이 어쩌다 그런 자리에 갔을까"라며 의아해했다. "결국 인맥 때문이 아니겠냐"는 말이 나왔다. 이씨는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의 전주고 선배였다.
국민연금공단은 615조원의 운용자산을 굴리는 세계 3위 연기금기관이다. 감사(監事)는 국민연금의 운영을 감시·감독하는 전체 서열 2위의 막중(莫重)한 자리다. 주요 감사 대상엔 김성주 이사장도 포함된다. 특히 전주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김 이사장은 이사장 내정 당시부터 "국민연금의 이익과 본사가 위치한 전주의 이익이 부딪힐 때 전주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그래서 이씨의 감사 선임은 고교 후배인 김 이사장을 제대로 감사할 수 있겠냐는 합리적 의심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금요일 늦은 오후 알려진 이 인사 소식은 이날 쏟아져 나온 미·북 정상회담 성사 같은 굵직한 뉴스의 홍수 속에 묻혀버렸다.
금요일 늦은 오후는 기자들에게 취약 시간대다. 기사를 마감한 상태에서 신문 제작을 쉬는 토요일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TGIF(Thank God It's Friday) 효과'다. 토요일 자 신문은 평일보다 지면이 적어 새 뉴스가 들어갈 자리도 넉넉잖다.
부끄럽지만 기자도 이 시간대에 새 뉴스가 나오면 머리가 무겁다. 노회한 홍보담당자들이 알리고 싶지는 않지만, 숨겼다간 나중에 문제가 될 만한 보도자료를 금요일 오후에 슬그머니 풀어놓곤 하는 이유다.
작년 말 KB금융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을 직제에도 없던 계열사 부회장 자리에 내정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을 때도 그랬다. 1주일여 전 기자가 KB금융 계열사인 KB부동산신탁이 부회장직을 신설하고, 이를 위해 사장실 옆에 부회장실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 중이란 얘기를 듣고 이 회사 정순일 사장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일이다. (임기가 끝나서) 집에 갈 사람이 뭘 알겠느냐"며 잡아뗐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정 사장은 사장에 유임됐고, 1주일쯤 뒤 금요일 저녁 KB금융은 김정민 부회장 선임 소식을 슬그머니 보도자료를 통해 알렸다.
금요일 오후에도 누군가는 '감시견'의 역할을 해야 한다. 기자뿐 아니라 검찰, 경찰 같은 직업을 택한 이상 이것은 숙명이다. 봄기운을 타고 나른해질 수 있는 금요일 오후, 다시금 긴장의 고삐를 조여본다.
입력 2018.03.1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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