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헵번이 선택한 디자이너’ ‘파리 패션의 창조자’ ‘패션의 전설’ ‘오뜨 꾸뛰르의 대가’…

세계적 패션 거장, 프랑스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를 일컫는 수식어다. 지난 10일(현지 시각) 91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지방시의 동거인 필리프 브네는 12일 성명을 내고 그의 죽음을 공식 발표했다. 브네에 따르면 지방시는 잠을 자던 도중 사망했다. 브네는 “위베르 드 지방시의 죽음을 알리게 된 일은 큰 슬픔”이라고 심경을 표했다.

위베르 드 지방시는 2018년 3월 10일 잠을 자던 중 사망했다.

지방시는 1950~1960년대 패션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외신은 지방시가 멘토 발렌시아가, 크리스찬 디올, 그리고 이브 생 로랑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패션을 정립했다고 평가했다.

지방시가 추구한 심플하고 우아한 스타일은 특히 상류층의 사랑을 받았다. 지방시의 뮤즈였던 배우 오드리 헵번을 비롯해 할리우드 출신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존 F.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부인 재클린 캐네디등이 지방시의 옷을 즐겨 입었다.

◇ 귀족 소년, 패션에 눈 뜨다…법학도에서 디자이너로

지방시는 1927년 2월 20일 프랑스 보베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1930년 지방시의 아버지가 감기로 사망한 뒤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외조부모가 그의 가족을 거뒀다. 이런 환경 덕분에 지방시는 어릴적부터 천과 재봉틀, 보석을 가까이했고, 남다른 패션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지방시가 10살 되던 해, 그는 가족들과 함께 파리에서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를 관람하러 갔다. 박람회에는 당대 패션계를 이끌었던 샤넬, 엘자 스키아파렐리 등의 작품이 전시됐다. 지방시는 후에 이 박람회에 참석한 것이 디자이너로서 영감을 깨워준 기회였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의 지방시(왼쪽)와 1952년 지방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파리에 문을 연 디자인 하우스(오른쪽).

그러나 당시 지방시는 법학을 공부하던 법학도였다. 가족들도 그가 법조계로 진출하길 바랐다. 그러나 지방시는 결국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했다. 지방시의 어머니도 그의 꿈을 지지하기로 결정했고, 1945년 17세의 지방시는 파리 유학길에 오른다.

지방시는 파리 국립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자크 파스, 로베르 피게, 크리스찬 디올, 엘자 스키아파렐리, 피에르 발망 등 여러 디자이너 밑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1952년, 프랑스 파리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디자인 하우스, ‘지방시(Givenchy)’를 연다.

1년 뒤, 지방시는 그의 인생과 패션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지방시는 1953년 뉴욕의 한 파티에서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를 만난다. 지방시는 발렌시아가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면서 그를 평생 멘토이자 절친한 친구로 삼는다.

◇ 지방시의 영원한 뮤즈, ‘만인의 연인’ 오드리 헵번

배우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지방시가 디자인한 ‘리틀 블랙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는 지방시의 뮤즈였다.

두번째는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과의 만남이었다. 헵번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 출연해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헵번은 지방시의 매장에 방문해 자신의 옷을 만들어 줄 것을 제안한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지방시는 헵번을 처음 보고 그 아름다움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당시 지방시는 다음 컬렉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헵번만을 위한 옷을 만들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이전 시즌 제작한 모든 옷을 헵번이 입을 수 있도록 했다. 지방시는 헵번이 자신의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옷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감탄했다.

그렇게 헵번과 인연을 맺은 지방시는 1954년 헵번이 출연한 영화 ‘사브리나’에서 헵번의 의상을 맡았고, 오스카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한다. 이를 계기로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지방시는 헵번의 작품 속 의상 디자인을 도맡았다.

특히 1961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헵번이 입었던 ‘리틀 블랙 드레스’는 지방시가 디자인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WP는 “헵번의 블랙 드레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로 기억된다”고 평했고, 뉴욕타임스(NYT)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헵번이 입은 드레스는 20세기 영화 패션 중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헵번은 지방시의 평생 뮤즈이자, 친구였다. 지방시가 제작한 의상을 즐긴 헵번은 우아함의 아이콘이 됐다. NYT는 “헵번의 우아한 이미지는 그가 출연한 대부분 영화의 옷을 제작해준 지방시 덕분”이라고 했다. 지방시는 헵번을 위해 최초의 향수 컬렉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헵번과 지방시는 한때 연인으로 발전했으나 평생 친구로 남기로 했고, 이후 헵번이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약 40여년간 디자이너와 고객을 넘어선 우정을 이어갔다.

◇ 지방시, 진화·발전 거듭…은퇴 후 활발한 예술 활동 이어가

지방시는 1960년 기성복 상점을 열었다. 전 세계 여성들이 좀 더 낮은 가격으로 고급의상을 입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방시는 고급 여성 주문복을 지칭하는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를 이끄는 대표적인 디자이너가 됐다.

지방시는 진화를 멈추지 않았다. 1969년부터는 남성복 라인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는 가구 제작용 직물과 호텔 인테리어, 심지어 포드사와 협력해 자동차도 디자인했다. 이후에는 보석과 화장품, 스포츠 용품 등 부문에도 진출했다. WP는 “(모든 분야에서) 지방시의 기발한 낭만주의와 심플하고 우아한 디자인 미학은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전했다.

지난 199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1995/1996 F/W 지방시 오뜨 꾸뛰르 패션쇼에서 박수를 받는 지방시.

지방시의 명성은 높아만 갔지만, 그는 은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81년 샴페인 제조사인 뵈브 클리코에 향수 라인을 분할 매각했고, 1988년에는 자신의 브랜드 ‘지방시’를 다국적 패션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에 매각했다.

지방시는 6번의 패션쇼를 더 개최한 뒤 1995년 후계자 존 갈리아노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패션 디자이너로서 삶을 은퇴했다. 알렉산더 맥퀸, 줄리앙 맥도날드, 클레어 웨이트 켈러 등 내로라 하는 디자이너들이 지방시의 명맥을 이어갔다. 지방시는 은퇴 후 대학 강의를 하거나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예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 셀럽이 사랑한 브랜드 ‘지방시’…죽음 애도 물결

지방시 패션은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다. BBC는 “지방시 드레스는 시상식에 참여하는 배우들이 즐겨 찾는 의상”이라고 했고, CNN도 “오늘날 지방시 브랜드는 여전히 의미있고 혁신적”이라며 “비욘세, 카니예 웨스트, 리한나 등 유명인들이 지방시의 팬을 자처하고 있다”고 전했다. 2007년 프랑스 우체국은 지방시에서 디자인한 발렌타인데이 우표를 발행했고, 2014년 스페인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에서는 지방시 작품 95점을 전시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지방시는 3월 10일 파리 근교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사망했다. 그의 동거인이었던 필리프 브네는 12일 AFP를 통해 지방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면서 “조카 등 가족들과 함께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방시 공식 트위터 계정 캡처

많은 이들이 패션 거장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지방시는 공식 SNS 계정을 통해 프랑스 오뜨 꾸뛰르의 주요 인물이자 반세기를 넘어 파리의 세련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상징이었다”는 글을 올렸다. 브랜드 지방시를 소유하고 있는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매우 슬프다. 지방시는 1950년대 파리를 패션의 중심으로 만든 디자이너 중 하나”라고 했다. 패션 잡지 보그는 이날 ‘보그에 실렸던 지방시의 베스트 의상’이라는 글로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NYT 패션 디렉터이자 평론가인 바네사 프리드먼은 이날 트위터에 “헵번의 디자이너를 넘어 거장이었던 지방시와 작별 인사를 한다”고 했다. 마리끌레르 패션 디렉터인 니나 가르시아도 “진정한 꾸뛰르어(couturier) 지방시, 그는 ‘영원한 견습생’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스타들에게 옷을 입혔고, 오드리 헵번과 같은 패션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당신의 멘토 발렌시아가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지방시의 죽음을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