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새벽 1시 55분쯤 장모(43)씨가 ‘보물 1호’ 흥인지문(동대문)의 담을 넘었다. 지나가던 시민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112에 신고했다.

2분이 지난 새벽 1시 57분쯤 효제파출소 경찰 2명과 흥인지문 안전경비원 2명이 함께 현장으로 달렸다. 장씨가 종이상자를 겹겹이 쌓아 라이터로 불을 붙이던 장면이 경비원의 눈에 들어왔다. 불길은 이미 박스를 태우고 있었다.

경찰이 장씨를 덮쳤고, 경비원들은 근처에 있던 소화기로 불을 껐다. 불은 소화기로 완전히 꺼졌다. 새벽 2시3분. 신고가 들어온 지 8분 만이다. 피해는 흥인지문 담 일부가 경미하게 그을리는 데 그쳤다.

장씨는 경찰조사에서 “교통사고 보험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억울했다. 그래서 홧김에 흥인지문에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장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장에 출동한 종로소방서 관계자는 "장씨가 음주상태는 아니었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장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종로소방서 소방관들이 9일 화재가 난 흥인지문 1층 담벼락을 조사하고 있다.


◇방화 전과, 보상금 불만 등 10년 전 숭례문 방화범과 닮은꼴
비슷한 장면은 10년 전에도 있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5분쯤 경기도 고양시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던 채모(80)씨가 숭례문(남대문) 서쪽 성벽에 알루미늄 사다리를 붙였다. 채씨가 숭례문에 진입하는 광경을 시민이 목격 112에 신고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조치가 이뤄지지 못했다.

사다리로 누각 2층으로 올라간 뒤 그는 바닥에 시너를 뿌린 뒤 불을 질렀다. 숭례문을 빠져나가기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당시 숭례문에 관리자가 오후 8시에 퇴근했던 까닭이다.

택시를 타고 현장에서 도주한 채씨는 강화도 전 부인의 집으로 돌아가, 마을회관에서 하루 종일 화투를 쳤다. 그는 11일 오후 7시40분쯤 경찰에 체포됐다. 숭례문은 이미 전소(全燒)된 상태였다.

채씨는 경찰 조사에서 “토지 보상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억울했다. 그래서 홧김에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적 123호인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지른 방화 전과가 있었다.

2008년 화재로 전소된 숭례문의 모습.


◇이번에는 대처가 빨라...현장 관리 허술함은 여전
숭례문 방화 10년. 흥인지문에 찾아온 화마의 위기는 시민과 경찰, 현장 경비원의 신속한 대처로 모면할 수 있었다.

현재 흥인지문에는 3명씩 4개의 조(組)를 짜서 24시간 감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신고가 들어온 지 2분 만에 안전경비원이 현장에 당도하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고 말했다.

이번 일로 관리의 허술함도 드러났다. 장씨가 담을 타고 넘어가는 장면이 관리 당국에 포착되지 못한 것이다. 흥인지문에는 총 4대의 CCTV가 있고, 밤에 촬영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해 24시간 조명이 켜져 있다.

문화재청 측은 “외부인의 침입은 사람이 CCTV를 통해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흥인지문 관리소 관계자는 “성인 남성이 출입문을 넘는 데 10~15초밖에 걸리지 않는데, 어두운 밤에 범행이 이뤄져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사람이 CCTV를 감시해야 하는 구조인데, 출입문을 타고 넘는 것까지는 일일이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화재 당시 화재경보기 등 안전장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불꽃 감지기가 작동할 만큼 온도가 올라가지 않았다"며 "연기 감지기 작동 여부에 대해서는 더 파악해 보겠다"고 말했다.

출입통제된 흥인지문 출입문.

이번 흥인지문 방화에 대해 문화재청은 "문화재 재난 안전 전담인력 배치를 더욱 강화하고, 침입·이동감시 센서 등 사물인터넷(IoT) 기술 도입을 도입하는 등 문화재 재난 안전 체계를 보다 강화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