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흑발은 시간이 흘러 이제 새하얀 은발이 됐지만 ‘활화산’이라는 별명은 여전하다. 불같은 피아노 연주만큼 변덕스러운 성격과 예민한 완벽주의자. 그는 “홀로 무대에 서는 독주는 너무 외롭다”며 1982년 이래 독주회를 열지 않았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전기가 나왔다! 제목도 '마르타 아르헤리치'. 부제는 '삶과 사랑, 그리고 피아노'. 클래식 음악 전문 기자인 올리비에 벨라미가 썼고, '음악의 기쁨'의 역자인 이세진이 옮겼다. 2010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었을 때의 부제는 라벨의 곡에서 딴 '어린이와 마법'.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아르헤리치, 너무 그 자신인 상태로 음률에 빠져 있는 아르헤리치의 얼굴을 표지로 썼다. 탁월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일차원적인 수식어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딱히 음악을 알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내 마음까지도 출렁이게 한 근래의 사건이었으니,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얼마나 기쁜 일이었을지 감히 짐작도 못 하겠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마르타 아르헤리치라는 이름에 따라다니는 '여제(女帝)'라는 수식어 때문이었다. 여제? 여제라는 말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한테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도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허리까지 오는 은발을 휘날리며 피아노를 두드리는 아르헤리치를 보면서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책의 표지에는 음악평론가 강헌이 추천사를 쓴 띠지가 둘려 있다. "'여류 피아니스트'라는 불필요한 수식어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등장과 함께 드디어 폐기되었다!" 으아, 지겨운 여류! 여류라는 지긋지긋한 말을 언제쯤 보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실소가 나왔다.

이 책을 읽으며 간만에 독서가 주는 행복감을 제대로 느꼈다. 어린 시절 부분을 읽을 때는 설화나 동화를 읽는 것 같고, 비르투오소('꽤 괜찮은 연주자'라는 의미로 이 책에서 쓰고 있다)가 되기까지 수련의 과정은 무협 영화에서 스승을 찾아 헤매던 고수의 전사(前史)만큼이나 흥미진진했고, 아르헤리치의 삶과 사랑, 우정에 대한 이야기는 음… 뭐라 말하지 못하게 좋았다.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는 괴담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비위생적이고 끔찍한 이야기에 지쳐 인간이라는 종이 싫어지고 있던 터라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책에는 아름다운 인간과 그 인간이 사랑해 마지않는 음악이라는 세계와 그것들을 숭앙하는 인간들이 빼곡하다. 게다가 올리비에 벨라미는 기가 막힌 리듬을 가졌다! 나는 이 책으로 도피하는 내내 행복했다.

일단 아르헤리치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인 것부터 말하기로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어로 '좋은 공기'라는 뜻이고 아르헨티나는 라틴어로 '은(銀)'이라는 뜻이라는 걸 상기하며 아르헤리치(Argerich)라는 이름은 '은이 많다'는 뜻인가 싶었다. 조상은 크로아티아계와 카탈루냐계. 혈통에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피도 섞였을 가능성도 섬세한 저자는 놓치지 않는다.

아버지는 마초, 어머니는 페미니스트. 기질이 강한 그의 부모는 평생 대립했다. 폭군이었으며 이야기꾼이었던 아버지는 갓난 아르헤리치의 눈에서 천재성을 보고는 두뇌가 자극되라고 으스스한 소리를 내며 괴물 문어처럼 아기 머리를 주물렀다. 두뇌와 투지에도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그 에너지를 딸에게 과잉 투사하는 여자였다.

"넌 피아노 못 치지!"라며 자신을 무시하던 건방진 남자아이의 기를 꺾기 위해 전투적으로 피아노를 두들긴 게 아르헤리치 음악 인생의 시작. 영재에 대한 이야기가 다 그렇듯 그다음은 예상할 수 있는 패턴이다. 연주에 깜짝 놀란 선생님은 부모를 호출하는데, 부모는 아이가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아이의 절대적 재능은 곧 부에노스아이레스 사회에 알려지고, 대통령이던 후안 페론을 접견, 그의 힘으로 아르헤리치 아버지는 빈 주재 아르헨티나 외교관 직원이 되어 아르헤리치 가족은 빈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거기서 아르헤리치는 제자를 받지 않기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굴다의 제자가 된다.

"프리드리히 굴다의 연주를 들으면서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상쾌한 강풍이 자기 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방약무인한 젊은이의 모습 그대로도, 자유롭고 개방적인 정신을 유지한 채로도 클래식 음악을 할 수 있다니!" 굴다는 아르헤리치의 인생에서 절대적인 사람이었다. 굴다는 아르헤리치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 아르헤리치! 우리는 같은 족속인 것 같다." 아르헤리치의 인생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평생을 걸쳐 이런 절대적인 만남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다. 서로를 제대로 알고, 서로를 섬세하게 이해하고, 이해받는, 그런 흔치 않은 대사건이 너무나 여러 번인 것이다.

당연히 아르헤리치는 매력적이다. "한계도, 라이벌도 없다"고 평가받는 재능과 부소니, 제네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운을 차치하고라도 예민하지만 따뜻한 성격, 멍하면서 진중한 표정, 보이시한가 하면 관능적이고,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를 양성구유의 매력이 있다. 아르헤리치의 연주회를 간 적이 없으며, 작정하고 그녀의 연주를 들은 적이 없는 나는, 친구 집이든 카페든 연주하는 아르헤리치를 보게 되었고, 그때마다 나는 '피아노를 두드리는 아르헤리치'라는 압도적인 물성에 꼼짝달싹하지 못하곤 했었다. 이 책을 읽다 앞에 나열한 것 아닌 그녀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했는데… 말이다. 재치와 지성, 따뜻함과 유머가 섞인 아르헤리치의 말은 다른 어떤 것보다 압도적이었다.

누가 자기를 소개하려면 도망가서 "그런 건 자연스럽지가 않잖아요"라고 말하고, 연주를 끝내고 나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오늘 내 연주, 미친 말이나 새끼 돼지 같지 않았어?" 어떻게 그런 손놀림으로 피아노를 치느냐고 기자가 묻자 연세가 많은 선생님께 배웠는데, 선생님의 벌어진 치아에서 피아노에 침이 많이 튀었다며 "손가락에 침이 묻지 않게 피하려면 속도를 내는 수밖에 없었지요"라고 말한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기도 한 전력이 있는 그녀는, 쇼팽을 남다른 마음으로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이루어질 수 없는 내 사랑이지요"라고 말하고, 프로코피예프와 라벨에 대해 묻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니라 그 작곡가들이 날 좋아한다니까요." 그리고 대가가 되고 나서 연 마스터클래스에서 한 소녀의 연주를 듣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이 곡을 연주할 때 이렇게 잘했으면 좋겠네요."

아르헤리치처럼 말해주는 절대적인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한다면, 내가 아르헤리치 같은 절대적인 사람이 되어주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