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여덟 살 때부터 서른두 살에 뒤늦게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충청도 아산에서 살았다. 소설의 리얼리즘 관점에서 볼 때 이순신이 충청도 방언을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의 부하 중 90%는 호남 사람이었다."
전남 화순에 사는 소설가 정찬주(66)가 역사 소설 '이순신의 7년'(전 7권·작가정신)을 냈다. 이순신이 1591년 전라 좌수사로 부임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쓰러질 때까지 7년을 새롭게 다뤘다. 이순신이 "인자 나는 앞으루다가 워처케 싸우고 죽음까정 가는지를 명명백백허게 밝힐 겨"라며 구수한 사투리를 풀어놓으며 '난중일기'를 적어갔다는 소설이다. 그의 부하들은 대개 "지야 뭐 한양에 댈 끈이 읎는 흥양 깡촌놈이랑께요. 긍께 벼슬은 포기허고 수사 나리 모심서 살지라우"라며 호남 사투리를 경쾌하게 날린다. 서술은 표준어로 이뤄지지만, 대화는 생동감 넘치는 방언의 향연이다.
이 소설은 2015~2017년 전남 도청 홈페이지에 연재된 작품이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2015년 당시 전남도지사 재직 중 작가를 찾아와 "호남이 의향(義鄕)이었음을 알려주는 문학 작품이 없어서 아쉽다"며 소설 연재를 청탁했다고 한다. 이미 10년간 이순신을 연구한 작가는 주저 없이 주간 연재를 시작해 3년 동안 200자 원고지 8000장 분량을 써냈다. 작가는 "기존의 소설과 영화에서 많이 다룬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과 그를 영웅으로 만든 백성과 재야 선비, 승려, 노비들의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며 "미시사(微視史)의 관점에서 그 시대의 음식·복식·주거 문화를 상세하게 묘사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조선왕조실록' 이외에도 이순신이 활동한 광양만 지역의 양반 가문에서 내려온 문집(文集)도 참고했다. 그는 "고흥·광양·보성·순천의 지역 유지들이 이순신의 수군을 많이 도왔다"며 "소설 연재 중 '우리 집안 이야기를 잘 써달라'는 부탁도 받았고, 어느 집안은 임금이 보낸 교지(敎旨) 원본을 갖고 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그리고자 한 이순신의 초상은 "지는 임금의 신하가 아니라 지댈 디 읎는 백성덜의 신하가 되구 싶구먼유"라는 진술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이순신은 10년간 처가살이를 하면서 원래 문과를 지망했지만 보성 군수로 부임한 장인을 따라 호남에 갔다가 왜구가 저지른 노략질의 참상을 보고 나서 '백성을 지키는 무장(武將)'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장인이 명궁(名弓)이었기 때문에 이순신의 활 솜씨가 빨리 늘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거북선에 관한 오류도 바로잡으려고 했다. 그는 "거북선 모형을 보면 대개 용두(龍頭)를 꼿꼿이 세워놓는데, 이는 실제와는 다르다"며 "당시 거북선은 용두에서도 화포를 쐈기 때문에 용의 목이 수평으로 놓였다"고 주장했다. 이순신의 유명한 말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이 소설에서 "싸움이 한창 급허니께 내가 죽었다는 말을 당최 허지 말으야 혀"로 표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