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을 찾는 사람들은 '근정'이란 이름에 '아, 부지런히 정치를 한다는 뜻이겠구나' 생각한다. 하지만 그 속뜻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최근 '경복궁, 시대를 세우다'(너머북스)를 출간한 장지연(44)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경복궁 전각의 이름을 붙였던 정도전은 '서경(書經)'에서 삼대(三代·중국 고대 하·은·주나라) 군주들의 부지런함을 인용하며 이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다. '쓸데없이 바쁘게 굴며 자잘한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지 말고, 어진 사람을 찾아 임명하는 일처럼 반드시 군주가 해야 할 일에만 부지런해져라'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드물게 '전(前)근대 도시사(史)'를 전공한 장 교수는 이 책에서 수도 서울이 어떤 이념에 의해 건설됐는가를 짚는다. '고려 조선 국도풍수론과 정치 이념'을 비롯해 최근 자신이 쓴 연구서·논문 8편의 내용을 녹여냈다.

경복궁 흥례문 앞에 선 장지연 교수는“경복궁은‘똘기’충만한 사대부들이 개인적 각성을 정치의 영역까지 확장하려 했던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장 교수는 "때론 형식과 절차 자체가 이념이 된다"며 "조선 건국의 주역들이 새 수도라는 공간에서 펼치려 했던 이념은 성리학이었다"고 했다. 그는 경복궁의 궁궐 배치를 예로 들었다. 안쪽에서부터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은 '편안히 홀로 있는 곳에서 자기 수양을 하라',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은 '신하와 자주 만나 투명한 정치를 하라', 정전인 근정전은 '꼭 부지런해져야 할 일에만 부지런해져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각각 '대학'에 나오는 '성의(誠意)·정심(正心)' '격물(格物)·치지(致知)'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단계를 순서대로 표현한 것이다. "당시 성리학은 500년 구(舊)체제의 더께를 벗어나려는 이념이었습니다. 조선과 한양, 경복궁은 '똘기' 충만한 사대부들이 개인적 각성을 투명하고 공정한 정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려 했던 욕망의 결과물이었던 셈이지요."

장 교수의 책은 '서울이란 지역이 어떻게 나라의 수도가 됐는가'에 대해서도 꼼꼼히 되짚는다. '무학대사가 골랐다'는 속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무학대사 설화는 임진왜란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궁궐을 동향으로 지으라는 무학대사 말을 듣지 않고 남향으로 지었더니 200년 뒤 큰 난리가 났다는 얘기가 만들어집니다." 웬 노인이 '무학은 10리만 더 서쪽으로 가라'고 해서 '왕십리(往十里)'란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도 고려 때는 이 지명이 '왕심리(往心里)'였다는 걸 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양을 수도로 정한 결정적 요인은 '국토의 중앙이라는 입지와 조운(漕運·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 소통이 원활하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클릭 몇 번이면 하루 이틀 만에 택배가 오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원거리의 세곡(稅穀)을 수도에 운반하기 위해선 넓은 물길이 필요했고 그것이 한강이었다. 장 교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은 상징을 통해 자신들 이념을 드러내려 하지만, 그것은 시대정신에 부합했을 때만 지속성을 지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