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생전 마지막 모습. 그 잊히지 않는 기억에 아파하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아픔은 어머니를 홀로 떠나보낸 한이겠지요. 두려워서, 힘들어서, 끔찍해서 어머니의 아픈 몸에 더 다가서지 못할 때, 그러나 어머니는 말합니다. 괜찮다고, 넌 거기 있으라고.
홍여사 드림
며칠 전 친정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CT 촬영 준비를 위해 탈의실로 들어가는 엄마를 따라 저도 들어갔지요. 팔을 돌리기가 영 불편하다고 하니 소매를 빼고 꿰는 것이라도 거들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입구에서 저를 막더군요. "나 혼자 할게. 넌 밖에 있어."
엄마는 저를 문밖에 남겨두고 굳이 혼자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잠금장치까지 찰칵 돌리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저는 아차 하며 깨달았습니다. 내가 엄마의 탈의실에 따라 들어가선 안 되는 이유를 말입니다.
작년 가을 엄마는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암 조직을 제거하기 위해 한쪽 유방을 절제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신체의 일부를, 그것도 여자의 상징이라 할 만한 부위를 떼어낸다는 것이 끔찍하게만 여겨지지만 당시엔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암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방법은 아무래도 좋았죠. 엄마도 그랬습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그까짓 것 아까울 것 없다고….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여자의 마음이란 그런 게 아닌 모양입니다. 가장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고 나니 작은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엄마는 잃어버린 가슴을 무척 부끄러워하세요. 딸들 앞에서도 결코 옷을 벗는 일이 없으시죠. 포옹조차 더 이상 안 하려고 하십니다. 딸인데 어떠냐고, 한번 보자고 하면 손사래를 치며 몸을 웅크리십니다. "아서라! 내 눈에도 흉측한데 남이 보면 어떻겠냐?" '남'이라는 말이 조금 서운하지만 저는 그럴 때 더 이상 다가가지는 않습니다. 엄마의 자존심을 지켜 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날도 저는 굳이 엄마를 따라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탈의실 밖에서 잠자코 기다리니 한참 만에 엄마가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나오더군요. 저는 엄마의 팔을 잡고 CT 촬영실로 이끌었지요. 암의 재발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석 달에 한 번 촬영하는 날이었거든요. 결과가 좋으면 석 달의 삶을 더 허락받는 셈이죠. 우리는 대기실 의자에서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져 가는 엄마를 웃게 하려고 나는 이 말 저 말 아무 말이나 자꾸 걸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갈수록 짧아져 갔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완전히 말을 잃고,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더군요. 저도 모르게 그 눈길을 좇아가봤습니다. 거기엔 아흔 가까이 돼 보이는 할머니 환자분이 침대째 검사실로 실려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움푹 패고 주름진 얼굴에서 엄마는 눈을 못 떼고 있는 겁니다.
"아이고, 저 할매 봐라."
"아는 분이야?"
"아는 분이 아니고, 울 엄마 생각나서. 네 외할머니가 꼭 저렇게 나무뿌리같이 삐쩍 말라서 돌아가셨잖아. 기억 안 나니?"
나는 그 할머니의 얼굴을 다시 돌아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습니다.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듣고 남편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찾아갔었는데, 그때 달라진 할머니의 모습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미라와 같이 깡마른 모습이었죠.
"그때 울 엄마 체중이 30㎏까지 내려갔다. 처음엔 내 살이라도 떼주고 싶었는데 나중에는 차마 쳐다볼 수도 없었지. 60년 넘게 봐온 우리 엄마 고운 모습은 다 어디 가고, 마지막 그 모습만 아직까지 생생한 거라."
엄마는 환자복 소맷부리에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습니다. "꿈에라도 한번 보면 좋겠다. 다시 고와진 울 엄마 모습을…."
엄마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섰습니다. 드디어 이름이 불렸기 때문이죠. 검사실로 들어가며 엄마는 뒤를 한 번 돌아보더군요. 마치 못 돌아올 길이라도 떠나는 듯 저를 향해 힘겹게 웃어 보이는 겁니다.
그 순간 저는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엄마는 흉터가 부끄러워 가슴을 감추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식의 가슴에 아픈 기억을 남길까 봐 그랬던 겁니다. 고통스럽고 추한 모습이 아닌 넉넉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딸들에게 기억되고 싶었던 겁니다.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으로 자신을 포장하려 했던 겁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의 자존심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나 한심했습니다. 차라리 동생은 솔직하기라도 했죠. 도저히 무서워서 엄마의 가슴을 들춰볼 수가 없다고 저를 붙잡고 울던 애니까요.
맞습니다. 저는 솔직하지를 못했습니다. 엄마가 저를 밀어낼 때 저는 못 이기는 척 뒷걸음쳤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두려워서 도망간 겁니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상처를 보고 난 뒤 내가 겪어야 할 오랜 아픔을 알았기에…. 그러나 이대로 엄마를 떠나보낸다면 저는 두고두고 후회할 듯했습니다. 나중에 내 딸을 붙잡고 말할 것 같았습니다. 꿈에라도 울 엄마가 돌아온다면 엄마의 흉터 위에 눈물을 흘리겠노라고. 혼자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 말하겠노라고.
엄마의 암 선고를 듣고도 울지 않은 저인데, 그날은 엄마가 나오길 기다리며 혼자 조금 울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가 나왔을 때 저는 우격다짐으로 엄마를 꼭 안아주었죠. 엄마는 놀라서 버둥거렸지만, 곧 못 이긴 척 제 품에 안겨들었습니다. "얘가 왜 이래. 오늘따라…."
저는 대답 대신 더 힘주어 엄마를 끌어안았죠. 그날 차마 입으로는 못한 말을 오늘 이 자리에 적습니다. 엄마, 난 이제부터 엄마 딸이 아니야. 엄마 남편이야. 돌아가신 아빠 대신 내가 꼭 안아줄게. 나한테는 다 보여줘도 돼. 내가 좀 봐야겠어. 엄마의 상처를….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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