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쿠웨이트의 한 아파트에서 냉동고에 버려진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신원 확인 결과 2015년 쿠웨이트에 가사 도우미로 온 필리핀 여성 조안나 데마펠리스(29)로 밝혀졌다. 데마펠리스를 고용한 부부는 2016년 11월부터 집을 비우고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1년 넘게 방치된 여성의 시신 곳곳에 화상과 구타, 목 졸림 흔적이 발견됐다.
세계 최대 가사 도우미 송출국 필리핀 여론이 끓어올랐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데마펠리스의 시신 사진을 들고 휘두르면서 "돼지처럼 구워졌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가사 도우미로 나간 필리핀 여성들이 중동 등 외국에서 유린당한 일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에는 쿠웨이트에서 일하던 필리핀 가사 도우미 4명이 성적 학대를 당하다 자살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건에 대해 필리핀 정부가 쿠웨이트에 해명을 요구한 일도 있었다.
결국 두테르테 대통령이 강수를 두었다. 지난 12일 이미 허가를 받고 출국을 앞둔 사람까지 포함해 쿠웨이트로의 노동자 파견을 전면 금지했다. 무료 전세기를 급파해 쿠웨이트에 있는 노동자들을 귀국시키기까지 했다.
쿠웨이트 정부가 당황했다. 가사 도우미 살인 사건을 '개인 범죄'로 일축해오다 일주일 만에 손을 들었다. 필리핀 노동자 처우 보장을 위한 수습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인구가 405만명인 쿠웨이트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는 25만2000명에 달한다. 가사 도우미만 16만여명이다. 필리핀 정부가 노동자 파견을 중지하면 쿠웨이트 경제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필리핀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여권을 빼앗기고 감금된 채 저임금과 폭행, 성폭력 등에 시달린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필리핀 정부는 이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들이 벌어다 주는 돈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는 1000만명 이상으로 전체 인구(1억330만명)의 10%에 육박한다. 남성보다 여성이 많고, 여성은 대부분 가사 도우미로 일한다. 지난해 해외 체류 필리핀 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보낸 송금액은 281억달러(약 30조원)에 달했다. 국내총생산(GDP)의 8% 정도에 해당하는 돈이다. 필리핀에 대한 해외 직접투자액(2016년 80억달러)의 3배가 넘었다.
최근 필리핀 정부는 해외 가사 도우미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중동·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이 필리핀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 등 걸프 7개국에 송출된 필리핀 노동자는 200만명이 넘는다. 2014년 UAE에서 필리핀 노동자 처우 문제가 불거지자 필리핀은 UAE에 대한 노동자 송출을 전면 중단했다. UAE는 3년 만에 백기를 들었다. 지난해 9월 UAE 정부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을 보장하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필리핀 정부와 체결했고, 필리핀은 3년 만에 노동자 송출을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