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로렌, '평창' 티셔츠 출시… 아디다스, 이스트팩도 한글 패션 선보여
'상주곶감', '삼도농협' 등 엉뚱한 활자 새겨진 옷, 가방 등장
한글 레터링을 무국적이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받아들여
△'상주곶감', '삼도농협'이라는 한글이 들어간 보자기가 사용된 아디다스 운동화. 라프시몬스가 아디다스와 협업했다./사진=아디다스
한글 패션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디자이너 이상봉은 2006년 화가 임옥상의 붓필이 들어간 티셔츠와 재킷, 원피스 등을 들고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를 열었다. 같은 해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의 멤버들이 그의 패션쇼에서 착용하며, 국민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의 한글 옷은 애국적이었으되 패셔너블하진 않았다.
한글 패션이 대중의 품으로 파고든 건 2014년 배우 유아인과 디자이너 노앙이 함께 만든 뉴키즈노앙 러브시티 티셔츠였다. ‘ㅅEOUL, NEㅠYORK, TOㅋYO, PAㄹIS, ㄹONDON, MIㄹANO’ 등 세계 6개 도시 이름을 한글과 알파벳을 교묘하게 조합한 이 티셔츠는 카피 제품을 양산하며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어떤가. ‘외국인’ ‘상남자’ ‘꽃미남’ 등의 단어가 들어간 모자나 티셔츠를 입은 관광객이 간혹 목격될 뿐 한글 패션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그만큼 한글과 패션의 만남은 낯설고 어려운 것이었다.
◇ 상주곶감 보자기 활용한 라프시몬스
최근 한글 패션은 엉뚱하게도 명품 시장에서 포착되고 있다.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는 2018 봄/여름 컬렉션에서 한글 패션을 선보였다. ‘아메리카’라는 한글이 들어간 30만원대 티셔츠를 공개한 데 이어, 아디다스와 만든 협업 운동화와 이스트팩과 만든 가방에선 ‘자연이 빚은 상주곶감’, ‘삼도 농협’이란 한글이 들어간 보자기 원단을 포인트로 사용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라프시몬스와 이스트팩이 협업한 백팩, 지퍼를 열면 화사한 색감의 상주곶감 보자기 안감이 드러난다./사진=이스트팩
충격적인 협업(?) 소식에 네티즌들은 "외국인들이 영어 적힌 옷을 볼 때 이런 느낌일까?" "재미있긴 한데 사서 맬 자신은 없다" "디자이너가 상주에 농활(농촌 체험 활동)이라도 갔다왔다 보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내놨다. 확인 결과 상주곶감과 라프 시몬스와의 공식적인 교류는 없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농촌에서 일할 때 쓰는 스카프가 달린 모자나 고무장화를 패션쇼에 응용한 것을 보면, 한국의 농촌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벨기에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는 크리스찬디올의 예술 감독 출신으로,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독립 브랜드 라프시몬스와 캘빈클라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역임하고 있다.
△한국 농촌에서 흔히 보는 선캡과 고무장화를 패션쇼에 올린 라프시몬스(왼쪽)과 한글 넥타이를 선보인 요지야마모토/사진=각 브랜드
일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도 한글을 썼다. 영어와 일어를 그래픽처럼 활용한 2018 봄/여름 컬렉션에서 검은색 벨벳 수트에 '나무아미타불'이란 불경을 한글로 새긴 넥타이를 매치해 눈길을 끌었다.
최근엔 미국 디자이너 브랜드 랄프로렌이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는 미국 국가대표팀 유니폼 ‘TEAM USA’ 에디션으로 한글 티셔츠를 출시했다. 성조기를 든 폴로 베어 캐릭터 위에 큼직하게 ‘평창’이란 한글이 새겨진 티셔츠다. 그야말로 ‘정직한 한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 랄프로렌 동계 올림픽 기념해 '평창' 티셔츠 출시...정직한 폰트 눈길
브랜드 로고나 슬로건 등을 담은 레터링 패션이 트렌드로 부상한 가운데, 한글은 영어나 일본어보다 더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동서양의 문화를 혼합한 무국적 풍이나 제3세계 패션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서양인이 보기에 한글은 새롭고 독특한 느낌을 더하는 디자인 요소일 것이다. 지난해 러시아어가 들어간 패션 제품이 인기를 끈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분석했다.
△ 랄프로렌의 평창동계올림픽 미국 국가대표팀 유니폼 'TEAM USA' 에디션, 긴 소매 티셔츠는 145달러, 반소매 티셔츠는 125달러/사진=랄프로렌
서양인이 만든 한글 패션은 우리가 보기엔 촌스럽고 어색하다. 미국 유명 편집숍 오프닝세리모니는 지난해 한국적 모티브를 적용한 코리아 바시티 재킷(Varsity Jacket·대학이나 운동팀이 입는 재킷)을 선보였다. 스타디움 점퍼에 한글로 '오프닝 세레모니'라는 단어를 크게 새기고 태극기, 무궁화, 호랑이 등 다양한 디테일을 마구 조합했다. 이 재킷은 국내에선 애국심을 절로 고취시킨다고 해 '공무원 재킷'이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영국 BBC가 선정한 유망 신인가수로 주목 받는 한국계 미국인 뮤지션 예지는 ‘내가 마신 음료수(Drink I'm Sippin On)’ 뮤직비디오에서 ‘예지’ ‘드링크’ 등 큼직한 한글이 들어간 오버사이즈 재킷을 입고 등장한다. 예지는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노래를 부르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내가 무엇을 노래하는지 사람들이 모르기를 바랄 때 한국어 가사를 넣었다.” 해외 음악 팬들은 그의 한국어 가사를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인다고.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그래서 더 궁금증을 자아내는 한글은 이제 쿨하고 멋진 문자이자 매력적인 디자인 요소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