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舊正)을 폐지하려는 정부 시책을 어기고 설날 철시하고 쉬는 업자들에겐 10일간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겠음. 구정을 앞두고 떡 방앗간 영업이나 소·돼지 도축도 금지함….'

1950년 2월 3일 서울시가 발표한 구정 과세 금지 조치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며칠 뒤 서울시경국장은 '담화문'을 발표해 "설 전후 3일간 경찰을 총동원해 충무로·종로 상점가를 돌며 정상 영업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어린이들 때때옷은 신정(新正)에만 입히도록 하라”는 등 정부가 추진한 ‘단일과세 운동’을 보도한 기사(왼쪽·동아일보 1957년 11월 23일 자). 하지만 정부 방침에도 불구하고 1959년 설날, 어린이들은 한복을 차려입고 거리에 나왔다.

옛 신문 지면을 통해 보면 대한민국 출범 후 음력설 폐지를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인 건 1950년대 이승만 정부 때다. 일제 때의 '이중과세 타파' 운동 기조를 그대로 잇는 단호한 조치들을 해마다 시행했다. 1950년 설엔 돼지 80두를 몰래 도살했던 정육상이 경찰에 끌려갔다. 1954년 설을 앞두고 보사·내무·문교 장관이 합동 발표한 단속 방안 중엔 '학동(學童)들의 설빔 차림 등교 금지'도 있다. 국민을 낮춰 보던 그 시절 당국자는 "만일 구정 초라 하여 철시하는 상인은 영원히 철시를 하도록 할 것"이라는 모진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동아일보 1950년 2월 17일 자). 1958년엔 '국교 교사는 음력 정초를 전후하여 아동들에게 구정에 관한 인식을 줄 수 있는 언사를 일절 금한다'는 규제가 추가됐다. 쉽게 말해 교사가 "얘들아 며칠 뒤면 어른들께 세배하는 설날이지?"했다간 단속받는 것이다. 이런 방안들을 정부는 '구정 방해 조치'라 일컬었다.

음력설 금지는 계몽의 차원을 넘어 '탄압' 수준이었다. 언론에도 음력설 쇠는 건 '한심한 작태'라는 식으로 비난한 글들이 보인다. 1950년 한 신문은 '일부 몰시국(沒時局) 악덕배라고밖에는 규정지을 수 없는 시민들이 소위 음력 과세를 하기 위해 광태(狂態)를 부리고 있다'는 표현까지 썼다. 서양식 근대화에 몰두하다 보니 구정을 구시대의 잔재로 몰아 난폭하게 공격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리 금지를 해도 설날이면 거리는 텅 비고 귀성열차는 초만원이 됐다. 관가는 정상 근무일이라고 선언만 했을 뿐 공무원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워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1965년 설날 조선일보는 텅 빈 관청 사무실 사진을 찍어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국회도 설날이면 여러 가지 다른 이유를 대며 휴회했다. 이런 불합리의 시대가 오래갈 순 없었다. 1985년 정부는 설날을 '민속의 날'이란 공휴일로 지정했고, 1989년부터는 '설날'이라는 이름까지 공식적으로 붙였다.

1950년 어느 신문은 구정 과세를 비판하며 "서울 온 외국 손님의 안목이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지 수치스러운 일"이라 했다. 하지만 정말 수치스러운 건 도도한 민심의 물결을 힘으로 틀어막으려 했던 낡은 권위주의였다. 설날이 공식 폐지된 게 고종 33년(1896년)이니 설날은 90여년간 탄압받은 끝에 살아난 셈이다. 특히 올해는 민족 명절이 제 이름 그대로 완전히 복권된 뒤 꼭 30번째의 설을 맞게 되니, 명절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