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창덕궁과 창경궁 모습이 담긴 ‘동궐도(東闕圖)’ 복원본 앞에 서 있다. 최 소장은 “동궐도에 따라 훼손된 건물을 복원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며 “궁궐 같은 문화재도 사람이 살며 쓸고 닦아야 본래 모습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10년 전 오늘 국보 1호가 불타올랐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쯤이었다. 숭례문은 1396년 조선 태조 때 한양 도성의 남쪽 문으로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수난과 6·25전쟁도 견뎌낸 건물이었다. 화인(火因)은 방화. 토지보상금이 적어 불만을 품었던 70대 노인이 국보 1호에 시너를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화염에 휩싸인 숭례문은 5시간여 뒤 새까맣게 무너져내렸다.

눈물과 탄식이 진한 만큼 복원에 대한 관심도 컸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무너진 국보 1호는 제대로 완벽하게 복원돼야 한다고. 기대와 달리 부실과 비리가 끼어들었다. 숭례문 복구단장을 맡아 5년간 씨름했던 한 사람은 그 모든 일을 가감 없이 책으로 엮었다. 책이 나오자마자 직위해제, 대기발령, 징계가 이어졌다. 고꾸라지는 듯 보였던 그는 지난달 29일 우리 문화유산 연구와 보존·복원을 담당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취임했다. 지난 5일 최종덕(59) 소장을 만났다.

'산업화'와 싸워야 했던 숭례문 복구

―숭례문 복구단장을 하셨죠.

"시작은 복구 부단장이었고 1년 연수 다녀온 뒤 단장직을 맡았습니다. 숭례문 화재는 우리 문화재사(史) 비극이지만 역설적으로 특별한 기회이기도 했어요. 문화재청 공무원이나 무형문화재 장인들도 자원했고, 문화재 수리업체는 일 년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걸 감수하고 복구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모두 의욕이 넘쳤어요."

―의욕대로 되던가요.

"복구단은 컨트롤타워 역할이었습니다. 유학 시절과 창덕궁 관리소장 시절 고민했던 전통을 최우선으로 문화재를 복구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전통 재료와 전통 기법을 쓰고 중요무형문화재를 포함한 각 분야 최고 장인이 솜씨를 더하는 걸 원칙으로 했는데, 막상 일을 진행하니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나요?

"전통의 맥(脈)이 끊어진 재료와 기술이 많았습니다. 문화재도 산업화는 피해갈 수 없었던 거예요. 196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목공 기계가 넘어왔고 장인들이 쓰는 도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이미 바뀌었습니다. 1970년대 문화재관리국은 전통 단청을 폐기하고 공식 색상을 정해 페인트로 칠하게 했어요. 들쑥날쑥한 전통 단청보다는 표준화가 우선이었죠. 손으로 만든 전통 기와는 KS마크 심사에서 줄줄이 탈락했습니다. 공장제 기와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요."

―공업화, 표준화가 나쁜가요?

"쓰기 편한 도구를 찾는 장인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문화재 복원 전반에 대한 철학이 부재했어요. 광화문 복원 낙성식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은 '앞으로 문화재는 백 년 이백 년 갈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이후 창경궁·경복궁 복원 땐 기계를 쓰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죠. 경복궁 전각 100여 칸을 헐고 박물관을 짓던 때였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반대가 맞겠지요. 이런 방식이 숭례문 복원 이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정작 숭례문 복구 현장에서도 기계를 사용했는데요.

"전통을 무조건 고수하면 강원도에서 소나무를 벌채해 물길로 옮겨 한강 나루에서 다듬고 달구지로 옮기는 게 맞습니다. 무거운 목재도 거중기를 이용해 사실상 인력(人力)으로 들어올려야 하고요. 옛 문헌을 보면 이 과정에서 죽고 다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기술이 끊긴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전통만 강요할 수는 없었지요. 대신 목재를 다듬고 돌을 자르는 작업처럼 사람 손이 닿아 생기는 질감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통 기와를 고집한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왜 전통을 고집했나

최 소장과의 만남은 숭례문이 아닌 창덕궁에서 이뤄졌다.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 최 소장은 건설부(국토교통부) 공무원으로 일하다 부처를 옮겼다. 2년간 창덕궁 관리소장을 맡았다.

"직접 몸으로 느끼면서 문화재 공부를 제대로 한 시간, 장소였습니다. 창덕궁 구들에 참숯으로 불을 때면서 여름철 곰팡이도 제거해봤고요. 창덕궁과 창경궁 본연의 모습을 잘 드러낸 동궐도를 다시 만들기도 했습니다. 부족했던 점도 채우고 생각도 많이 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집, 학교 같은 곳입니다."

―어쩌다 문화재 공무원이 됐나요.

"건설부에서 일할 때 '한국병'이 화두였습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사고 같은 부실공사가 심각했어요. 건설 한국병을 치료한다고 대대적으로 건축물 점검을 했습니다. 전국 대형 건축물 안전 점검하고 통계 내는 일이었는데 의미는 있었지만 흥미는 없었습니다. 평생 업으로 삼기 어려울 것 같아 다른 부처를 곁눈질했습지요."

―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었나요.

"고건물에 끌렸습니다. 우리 문화재를 공부하면서 일하면 나름 전공도 살리고 재밌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유홍준 청장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남도 편을 읽었는데 흥미로웠습니다."

―유홍준 청장과 무슨 인연이 있나요.

"궁 소장을 할 때 노총각이었는데,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대뜸 궁에 살아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이 넓은 창덕궁에 당직자가 두 명뿐이었습니다. 문화재청 허가받고 방 한 칸 빌려서 1년 반 정도 살았지요. 문화재를 안에서 24시간 직접 경험하는 건 크게 다르더군요. 물성(物性)이라고 할까요. 그 작은 차이를 느끼게 됐습니다. 철제 문고리 하나도 잡아당길 때 그 감촉이 공장제와 크게 달라요. 나중에 문화재를 복원한다면 전통 재료, 전통 기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숭례문 복원 때도 이런 생각이 반영됐고요."

숭례문 복원, 타산지석 됐으면

최 소장은 2014년 2월 '숭례문 세우기'(숭례문복구단장 5년의 현장 기록)라는 책을 냈다. 숭례문 부실 복구에 대해 감사원이 감사를 진행할 때였다. 대목장은 숭례문, 광화문 복구용 소나무를 빼돌린 혐의로 논란 중심에 섰고(조사 끝에 광화문은 유죄 판결 , 숭례문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철물 장인은 전통 철물 재현에 실패했다. 전통 단청은 금세 벗겨져 흉한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었다. 그는 "숭례문 용마루 위에 '부실 복구'라는 딱지가 씌워져 있다"고 썼다.

―굳이 그때 책을 내야 했나요?

"당시 문화재청 사람들은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봤습니다. 책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전하면 어느 정도 오해는 풀릴 거라 기대했어요. 막상 책을 내고 나니 내용 일부만 크게 부각됐습니다. 문제없을 거라던 사람들이 '정무적 판단력이 그렇게 없느냐'고 비판했고요."

―벗겨진 단청, 빼돌려진 목재처럼 명백한 비리도 있었는데요.

"잘못은 인정합니다. 복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청이 벗겨졌으니 욕먹는 게 당연하죠. 다만 복구 과정에선 최선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청 장인도 인간문화재 중에서 심의를 거쳐 골랐어요. 작업 중 자신이 없었는지 새벽에 몰래 화학 접착제를 썼는데 그것까지 챙기지 못한 건 문제가 맞습니다. 전통이라는 대원칙을 좇다가 정작 그게 가능한지 논의가 부족했던 거예요."

―애초 가능한 목표긴 했나요?

"'원래'가 무엇인지, 가장 좋은 것인지,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의욕이 앞섰습니다. 돌이켜보면 무리한 원칙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현대 기술을 쓰는 게 좋지 않나요.

"명맥이 끊긴 재료, 도구, 방법을 무조건 고집하긴 어렵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만 균형이 중요해요. 지금 기술로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전통을 복원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해선 안 됩니다. 전자현미경으로 전통 단청 안료를 분석해 재료와 방법을 연구하는 게 일종의 균형이에요."

최 소장에게 숭례문은 상처이자 훈장, 평생 뗄 수 없는 꼬리표로 남았다. 30년 가까운 공무원 생활 처음이자 마지막 징계도 숭례문 복구단장 책임을 물은 감봉 3개월. 복원된 숭례문에 몇 점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최 소장은 7022번 시내버스 이야기를 꺼냈다. 서울역~숭례문~경복궁을 지나 최 소장 집이 있는 종로구 부암동을 향하는 버스다.

"꼭 점수를 매겨야 할까요. 버스 안에서 바라보면 숭례문 처마와 기와에 눈이 갑니다. 전통 기와인데 공장 기와에서 찾기 어려운 은은한 미감(美感)이 좋아요. 이제 문화재 복구도 양보다 질을 따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숭례문 복원의 공과(功過)가 앞으로 문화재 복원 길잡이가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