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열풍이 뜨겁지만, 일부 TV 드라마와 예능은 여전히 여성을 성적(性的) 대상으로 보거나 은연중 성폭력을 미화해 '미투 무풍지대'로 비판받고 있다. 여성을 미숙한 존재 아니면 악녀(惡女)로 극단화시키는 경향도 여전하다.
"너는 그냥 변기 같은 거야. 내가 싸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싸고, 필요 없으면 확!" 지난달 17일 SBS 수목 드라마 '리턴'에서 남자 주인공 강인호(박기웅)가 내연녀 염미정(한은정)에게 던진 이 대사는 많은 시청자에게 불쾌감을 안겨줬다. 한 여성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작품은 '여혐(여성 혐오) 드라마' 비난을 받고 있다. 속옷 차림 여성들에 둘러싸여 내기 포커를 친 장면도 도마에 올랐다. 극 중 한 여성이 "우리가 물건이야? 왜 우리 가지고 내기를 해"라고 하자 화가 난 김학범(봉태규)이 유리컵으로 여성의 머리를 내리치고, 이를 본 오태석(신성록)이 여자 손에 수표를 쥐여주며 "병원비하고 나머지는 가방 사"라고 하는 장면이 논란이 됐다. 시청자 비난이 거세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리턴'이 방송 심의 규정을 위배했는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심의를 진행하고 있다. 방심위 관계자는 "조만간 제작진 의견을 들어보고 제재 수위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앵커가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의 한 드라마는 여자의 성공을 '욕망'으로만 취급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 3일에는 앵커 자리를 노리는 여성 후배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극 중 유명 골퍼와 성관계를 유도하는 모습까지 나왔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조혜련 교수는 "건강한 여성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성공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프레임을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다"고 했다. KBS2 '라디오로맨스'에서도 라디오 프로그램 메인 작가 자리를 놓고 "네가 어떻게 피디를 꼬셨는지 몰라도…"식의 대사가 나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로맨스로 미화되기도 한다. 지난해 방송된 MBC '왕은 사랑한다'에선 어깨를 밀어내며 거부하는 여성을 무시한 채 계속 키스를 시도하는 극 중 장면에 대해 "엄연한 성폭력을 로맨스로 포장해 방송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여성을 지적으로 미숙한 인물로 설정하고 남성들이 가르치는 프레임도 버젓이 지상파를 탔다. 지난달 처음 방송한 SBS '블랙하우스'에선 진행자 김어준이 여성 개그맨 강유미를 가르치고 칭찬하는 모습이 수차례 반복됐다. 아예 '정치를 잘 알지 못한다'는 뜻의 '정알못'으로 강유미를 부르고, 강유미는 남성 진행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나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남자(man)가 여자에게 뭔가 설명(explain)하려 드는 태도를 비판한 페미니즘 용어인 '맨스플레인'이라는 지적이다.
매년 드라마, 예능, 광고 등 대중 매체를 대상으로 양성 평등 모니터링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YWCA에 따르면 국내에서 성 역할 고정관념 조장이나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보는 시각 등 양성 평등 위반 사례가 TV에서는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에는 75건이던 양성 평등 위반 심의 요청은 지난해에는 121건으로 60% 이상 늘어났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표현 하나, 장면 하나를 지적하고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릴 때부터 방송이 여성을 그려내는 방식을 이해하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