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현지 시각) 찾은 독일 수도 베를린 남부 프리드리히스하인-크로이츠베르크(Friedrichshain-Kreuzberg· 이하 크로이츠베르크)의 번화가 스칼리처 슈트라세의 벽면은 난잡했다. 크로이츠베르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이 거리엔 이름 없는 예술가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쓴 'NO MORE WALLS NO MORE WAR(장벽도, 전쟁도 그만)'와 같은 글귀나 우스꽝스럽게 그린 우주인·개·코끼리·자동차·흑인 등의 그라피티(벽면에 낙서처럼 그리는 그림)가 벽면을 뒤덮고 있었다. 그 벽 앞으로 딱 달라붙은 청바지에 옆머리를 바짝 밀거나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팔뚝이나 목덜미 가득 문신을 한 젊은이들이 지나갔다.
근처 카페에서 물담배를 피우고 있던 필립 퓌어호퍼(27)씨는 "베를린의 모든 건물이 그라피티로 뒤덮이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27일 밤 11시 반쯤엔 베를린 동부 오스트반호프(동베를린역) 근처 한 건물 앞에 20~30대로 보이는 남녀가 500m가량 줄을 서 있었다. 발전소를 개조해 문을 연 클럽 '베억하인'이다. 자정쯤 클럽 안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박자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고 고개를 흔들며 입장했다. 클럽 직원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체코·오스트리아·스페인 등 전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 클럽을 찾는다"고 했다. 여름엔 대기 행렬이 1㎞를 넘기도 한다. 베를린에는 베억하인과 같은 대형 클럽이 300개가 넘는다. 이 클럽들이 올리는 연간 매출이 10억유로(약 1조3000억원) 이상이다.
'독일'이라면 엄격하고, 규율이 강하고,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요즘 베를린은 전혀 딴판이다. '힙스터(hipster)'의 천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힙스터는 유행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아직 유명하지 않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예술가·음악가·디자이너와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가진 창업가, 젊은 관광객들까지 베를린으로 몰려들고 있다. 주독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베를린은 유럽의 홍대"라고 말했다.
유럽의 힙스터들은 왜 베를린으로 몰려들까. 장벽으로 끊겨 있던 베를린은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등 경제 대도시에 비하면 임대료와 물가가 싼 편이다. 청년들이 런던이나 파리를 떠나 베를린으로 몰려드는 이유다. 이념 대결이 끝난 뒤 싹튼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분위기도 젊은 예술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한몫했다. 이 도시엔 갤러리 400여개가 있다. 전시회·음악회·공연 등 연간 1500여개에 달하는 행사도 열린다.
다소 비뚤어지고 반항적인 힙스터 문화는 첨단 유행을 이끌고 있다. 2014년 베를린 동물원 옆에 들어선 7000m² 규모의 복합 쇼핑몰 '비키니 베를린'이 대표적 사례다. 이 쇼핑몰에는 유명 브랜드 상점도 있지만 가장 입지가 좋은 중앙에는 힙스터들을 겨냥한 각종 편집 매장이 늘어서 있다. 매장 직원 크리스틴씨는 "2~3년 전부터 베를린의 패션이 유럽의 길거리 패션을 이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힙스터 문화는 베를린에 쏠쏠한 경제 효과를 안겨주고 있다. 우선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베를린 관광청에 따르면 2016년 베를린에서 하루 이상 머문 외국인 관광객은 1420만명으로 전년보다 3.9% 증가했다. 이 기간 관광 산업으로 올린 매출은 115억8000유로(약 15조6000억원)에 달했다. 베를린이 유럽 패션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패션 관련 업체가 2400개로 늘었다. 연간 20만명이 넘는 바이어가 패션쇼와 관련 전시회를 찾는다. 그 덕분에 2016년 베를린 지역 GDP는 2.7% 성장해 독일에서 가장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