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클라인
지하철을 타면 편하다
노인이 앞에 서면 불편하다
지하철이 지상에 도달하자 빛이 쏟아진다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노인은 여전히 앞에 서 있다
눈은 빛에 익숙해졌고
지하철이 흔들리고 있었다
노인의 뒤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노인들은 왜 낮에만 지하철을 타는가?
열차는 내선 순환하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눈은 다시 어둠에 익숙해지고
선릉역, 선릉역 말하자 선릉역에 서는 것
―황인찬(1988~ )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지하철 편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괜히 역세권, 역세권, 하겠는가. 지하철의 창은, 지하로 들어가면 거울이 되고 지상으로 나오면 발광체가 된다. 내 앞에 선 노인의 뒤편으로 펼쳐지는 어둠과 빛이 나의 미래라서, 나의 지금-여기가 너무 피로해서, 앉은 자리를 양보하기 쉽지 않다. 노인이 내 앞에 서 있으면 눈을 감게 되는 이유다.
선릉역 지나면 누에가 고치를 트는 잠실역이 시작되고 엄마야 누나야 같이 살자는 강변역을 지난다. 꼬꼬부랑까지 아홉 노인이 살았다는 구로역 지나 별이 떨어졌다는 낙성대역을 지나면 다시 큰 무덤이 있는 선릉역이다. 평균 88분, 아니 88년이 걸리는 노선이다. 매일 200만명이 이 순환선을 오르내린다. 곧 도착할 선릉역에서 누군가는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