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 동안 한국 정세를 파악·분석하면서 주한미군 사령관을 보좌해왔던 스티븐 브래드너(86) 전 주한미군 특별고문이 지난달 17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1월 31일 주한미군 관계자 등에 따르면 브래드너 전 고문은 미 로드아일랜드주(州) 손더스타운 자택에서 지병으로 숨졌다.

브래드너 전 고문은 '역대 최장수·최고령·최고위 주한미군 민간 정보관'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입대한 뒤 1954년 주한미군 정보부대에 배치받으면서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체포된 빨치산과 남파 간첩들의 심문에 참여해 중요 정보를 캐내고 북한 측 동향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브래드너 전 고문은 1955년 제대 후 귀국했다가 1957년 다시 한국으로 왔다. 대구 경북대에서 영어·서양사 강사로 4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버드대에서 아시아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64년 세 번째로 한국을 찾은 그는 주한미군 군무원으로 정식 채용돼 민간 정보관으로 공식 활동했다.

2013년 5월 서울 용산 미군 부대 나이트 연병장에서 열린 스티븐 브래드너(왼쪽) 특별고문의 은퇴식. 한·미 양국 군과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브래드너 전 고문은 1973년에 유엔사령관 특별 부(副)고문으로, 1981년에는 특별고문으로 공식 임명돼 81세였던 2013년 5월 은퇴할 때까지 50년을 현직에서 활동했다. 그가 정년을 훌쩍 넘기면서 활동했던 것은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명철한 분석과 정세 파악 면에서 그를 대체할 만한 인물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브래드너 전 고문은 1960년 4·19 혁명이 터지기 직전 서울 도심에서 미군 헌병 차량이 순찰하는 것을 보고 주한미군 정보사령관에게 "학생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진압 등에 미군이 개입될 경우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알렸다. 그의 긴급 보고로 주한미군 사령부는 전 장병의 긴급 귀대 지시를 내렸다.

브래드너 전 고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 전두환 정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미국으로 출국할 수 있도록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핵심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50년간 14명의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한국에 관해 조언을 했던 브래드너는 고령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2013년 물러났다. 5월 15일 용산 미군부대 나이트 연병장에서 열린 은퇴식에는 한·미 양국 군과 정부에서 고위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는 퇴임식에서 "한국에서의 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대해 줄곧 비판적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2001년 펴낸 책 '평화로운 한국을 위한 계획'에서 "북한의 김씨 체제는 종교적 광신과 범죄 집단이 결합된 형태"라고 했다. 브래드너의 아내는 1960년대 한국 농구계를 빛냈던 농구선수 박신자(77세·미국명 신자 브래드너)씨다. 부부는 은퇴 뒤 미국 로드아일랜드로 건너가 정착했다. 슬하에 1남 1녀와 손주 넷을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