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건축가 왕슈(王澍)는 올해 '건축 노벨상'이라 불리는 미국 프리츠커상 심사위원이 됐다. 왕슈는 2012년 중국인 최초로 이 상을 받기도 했다. 한국 건축계의 숙원인 이 상을 이미 받은 데 이어 심사까지 맡게 됐다. 일본은 제정 첫해인 1979년부터 심사위원단에 진출했고 수상자 7명을 배출하며 세계 건축계 주류로 도약했다.

건물 입구를 촘촘한 격자형 구조물로 장식한 서울 신사동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 고급 제품 매장이 많은 도산공원 앞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다. 중국의‘네리&후’가 디자인했다.

현대자동차와 삼성의 휴대폰을 베끼던 중국의 디자인이 괄목상대(刮目相對), 말 그대로 눈 비비고 다시 봐야 하는 경지에 오르고 있다. 중국 패션디자이너 궈페이(郭培)가 지난주 프랑스 파리에서 선보인 패션쇼에 대해 패션지 보그는 "수공예를 숭고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화려한 자수(刺繡)가 특기인 궈페이는 2016년 시진핑 주석과 함께 타임지 '세계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에 들었다. 2015년 팝스타 리하나가 그의 드레스를 입어 유명해진 뒤 단숨에 정상급 반열에 올랐다.

중국 디자인에 대한 편견은 뿌리깊다. 명품 쇼핑하듯 외국 스타 디자이너들을 모셔갈 뿐 여전히 베끼기에 급급하다는 시선이 많았고 실제로 그랬다. 이제는 다르다.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중국 디자이너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국산은 조악하다는 선입견에 도전하듯‘메이드 인 차이나’를 써 넣은 디자이너 펑첸왕의 남성복.

두각을 나타내는 건 외국에서 교육받은 디자이너들이다. 빨간색이나 황금색, 용 무늬 같은 중국 전통미를 내세우지 않고 현대적 감각으로 승부한다. 중국 디자인의 차세대 기수로 통하는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네리&후'는 지난해 '엘르 데코 디자인상'에서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됐다. 영국 재스퍼 모리슨을 비롯해 세계 최고 디자이너들이 받았던 상이다.

서울 도산공원 앞길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는 이들이 2016년 한국에 만든 대표작. 등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금빛 격자무늬 구조물을 실내외에 조성해 주목받았다. 세련된 디자인 덕에 '셀카 명소'로도 인기인 이 건물이 중국 디자이너 솜씨인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은정 설화수 디자인팀장은 "건물 설계와 실내 장식부터 이 매장에서만 파는 한정판 제품 디자인까지 네리&후에서 맡았다"고 했다.

신세대 중국 디자이너들은 의심 어린 시선 앞에 주눅들지 않는다. 남성복 디자이너 펑첸왕(王逢陳)이 런던패션위크에서 선보인 올해 봄·여름 시즌 패션쇼는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주제였다. 주름을 넣어 입체감을 살린 옷에 이 문구를 큼지막하게 집어넣었다. 중국 디자인은 조악하다는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두 명의 디자이너가 이끄는 남성복 브랜드 프로너운스(pronounce)는 올해 가을·겨울 시즌 패션쇼 무대에 분홍색 '마오(mao) 재킷'을 올렸다. 마오 재킷은 마오쩌둥 주석의 트레이드마크인 인민복을 이르는 말. 획일적일 것만 같은 중국에서 다채로운 상상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무언의 메시지다.

디자인 기초 체력을 기르기 위한 중국 정부의 노력도 활발해지고 있다. 중국엔 최근까지 디자인 정책이 없다가 2014년 국무원에서 지식재산권 보호 강화, 인재 양성 같은 내용을 담은 디자인 진흥 정책을 발표했다. 한국디자인진흥원 중국디자인센터 홍민석 소장은 "중앙정부에서 목표를 정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중국의 특징"이라며 "지방정부와 관련 단체들 사이에서도 디자인 붐이 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창의(創意)의 영역인 디자인은 정부 주도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대놓고 베끼고 디자인 가치에 무관심했던 중국은 더 이상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