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미국에서 '화염과 분노'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미국 정가가 발칵 뒤집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인 스티븐 배넌이 "트럼프의 장남이 대선 때 러시아 측을 접촉했고, 접촉 내용은 '반역적이고 비애국적'이라고 언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미 국민의 눈은 백악관이 아닌 '머서(Mercer) 가문'으로 향했다. 머서 가문의 핵심은 헤지 펀드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최고경영자(CEO)로 로버트 머서다. 그의 순자산은 9억달러(약 9600억원)로 추정된다. 머서 가문은 공화당 10대 기부자 중 하나로 지금껏 수천만달러를 지원했다. 배넌이 운영한 온라인 매체 '브레이트 바르트'도 사실상 머서 가문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넌이 트럼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도 머서 가문이 밀어줬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윗으로 아무리 배넌을 공격해도 커져만 가던 파문은 머서 가문의 짧은 논평 하나로 일단락됐다. '배넌과 지난 수개월간 얘기한 적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배넌은 브레이트 바르트에서 물러났고, 순식간에 실직자가 됐다. 돈이 미국 정치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 거부(巨富)들의 베팅이 또 시작되고 있다. 부자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미국의 문화에다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자신들 부(富)의 크기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이그재미너는 27일(현지 시각) 미국 공화당의 핵심 자금줄인 석유 재벌 찰스(83)·데이비드(78) 코크 형제가 11월 중간선거에서 최소 4억달러(약 4260억원)를 공화당에 지원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코크 형제가 이끄는 정치 단체는 "우리는 모든 것(all-in)을 걸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중간선거에선 하원 의원 전원(435명)과 상원 의원 3분의 1(34명)이 선출된다. 공화당은 상원에서 2석, 하원에서 22석을 더 잃으면 과반의 지위를 잃게 된다. 미국 NBC방송에 따르면 과거 중간선거에서 여당은 평균적으로 상원에서 2석, 하원에서 32석을 잃었다.
코크 형제가 퍼붓기로 한 돈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대선 자금(481억원)의 8배가 넘는다. 미국은 개인이 특정 정치인에게 2700달러(약 290만원) 이상의 후원금을 주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천문학적 정치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것은 간접적 선거 후원은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이른바 '소프트 머니' 때문이다. 미국은 후보자에게 직접 돈을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이 만든 정치 후원 단체를 통해 TV 광고를 대신 내주는 식의 선거운동은 무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라는 단체는 트럼프 지지 TV 광고를 만들어 전국에 틀었다. 트럼프의 얼굴도 나오고 공약도 나오지만 트럼프 선거 캠프에서 만든 것은 아니다. 눈 가리고 아웅인 듯 보이지만 후원자들이 돈을 내 '간접적'으로 선거운동을 도와준 것이다. 우리의 경우 개인은 특정 정치인에게 연간 500만원까지 후원할 수 있지만 기업과 단체는 후원금을 낼 수 없다.
경제 잡지 포브스에 따르면 코크 가문의 총자산은 2016년 기준 820억달러(약 87조원)에 달한다. 이들의 정치 후원금은 공짜가 아니다. 코크 형제는 환경 단체가 반대해 좌절됐던 미국 최대 원유 송유관 '키스톤 파이프라인' 건설이 트럼프 행정부 들어 재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키스톤 파이프라인 건설로만 코크 형제가 최대 1000억달러(약 106조원)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이 같은 정치 후원에 대해 "무제한 받을 수 있는 정치 뇌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민주당을 지원하는 억만장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헤지 펀드 운영자 출신인 억만장자 톰 스타이어는 지난 8일 민주당의 중간선거 승리를 위해 3000만달러(약 32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대선에선 8700만달러(약 930억원)를 민주당에 후원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강세 지역인 샌프란시스코 출신인 그는 지난해 11월에는 1000만달러를 들여 트럼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광고를 하기도 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실리콘 밸리는 민주당의 돈줄이다. 민주당이 이민에 호의적이어서 외국의 기술자를 받아들이기 쉽고, 온라인 쪽 규제도 덜하기 때문이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아마존 등 대부분의 IT 업체들은 지난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가장 큰 돈줄이자 지지 기반으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