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유일 '축소도시' 밀양
요양병원 전국평균의 2배
밀양, 5곳 요양병원 시설 살펴보니
27일 오후 1시쯤 나지막한 야산에 둘러싸인 경남 밀양시의 '○○노인전문요양병원.' 지은 지 10여년이 된 건물은 겉으로 보기에 신축 건물 같았다. 창이 많고 관리가 잘 된 것 같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단 1대였다. 가로세로 폭은 1m를 간신히 넘겨, 성인 남성이 3~4명만 타도 꽉 찼다. 폭 70㎝, 길이 1.85m 규격인 환자 이송용 침대는 아예 들어갈 수 없다.
화재 시에는 엘리베이터 말고 경사로나 계단을 이용하는 게 원칙. 그러나 침대를 밀고 내려올 경사로도 없었다. 위기가 닥치면 비상구 쪽 계단 한곳이 확보될 뿐이다. 이 비상계단을 알리는 ‘비상등’은 무릎쪽에 위치해 희미한 초록빛을 내고 있을 뿐이어서 방향을 인지하기 쉽지 않았다.
이 병원 병상은 약 130여개. 병원 관계자는 "병상이 거의 꽉 찼다"고 했다. 그러나 “당직 의사는 주말이라서 오후에 퇴근"했고, 간호인력(간호사와 간호조무사) 12명이 근무 중이었다. 요양병원도 '병원'인 만큼 의사·간호사 등 의료진이 상주해야한다. 이 병원에서 이날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면, 간호사및 간호조무사 1명이 환자 10명을 책임져야한다. 화재나 지진 같은 비상사태가 평일과 주말을 가릴까.
초고령 도시, 밀양은 불안하다
밀양 세종병원 화재로 38명이 사망했고, 이중 31명이 70대 이상이었다. 사망자 평균 연령은 80세가 넘었다. 자력으로 탈출 가능한 환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사망자가 늘어났다.
인구 10만의 밀양은 경남에서 유일한 ‘축소도시’(지역 기반 시설 대비 인구 감소폭이 큰 도시), ‘초고령화’ 도시다. 65세 이상 인구가 23%, 네 명 중 한 명이다. 우리나라 평균은 13.2%다. 밀양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진종만(73)씨는 밀양이 “‘나만사람(나이많은 사람)’ 천지”라고 했다.
노인이 많으니 이들을 겨냥한 ‘요양병원’ 숫자도 많다. 밀양의 요양병원은 총 6곳이다. 인구 1만7983명당 1개 꼴로, 전국 평균(3만3710명당 1개)의 갑절에 달한다.
이번에 화재가 난 곳은 세종병원 본관 건물로 부설 요양병원은 인명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병원 입원 환자 상당수가 노인들이었다. 밀려드는 노인 입원 환자를 병원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 기동팀이 27, 28일 세종병원을 제외한 밀양지역 요양병원 5곳을 전수 조사해봤다.(병원들이 실명 밝히기를 거부해 A, B 병원 식으로 표기했다.)
◇ 대피문 잠겨있고 스프링클러 없어…불안에 떠는 노인들
세종병원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 A 요양병원. 이 병원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구조부문·의료부문 종합평가결과 '2등급(84점 이상~92점 미만)'을 받은 우등 기관이다.
그러나 화재 감지기만 있을뿐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병원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 안으로 설치 예정"이라고 했다. 비상벨은 병동 3개 중 한 곳에만 있었다. 1층에 마련된 비상대피로 출입문 중 한 곳은 굳게 잠겨 있었다. 병원 관계자는 "환자들이 문을 열어두고 다닐 때가 많아 추워서 잠가놨다"고 말했다.
B요양병원은 소화기가 있어야 할 곳에 병원 비품이 담긴 박스가 쌓여있었다. 비상계단에도 자재들이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C·D요양병원은 불이 나면 지상으로 펼쳐져 환자의 탈출을 돕는 피난구조대와 완강기가 없었다. 병동에서 비상계단으로 나가려면 전자 잠금장치가 달린 철문을 열어야 하는데, 직원이 카드키를 넣어야만 열 수 있도록 했다. 외부에서 열려면 잠금장치를 부수고 강제로 여는 수밖에 없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은 가팔랐다. 지난해 11월 허리와 고관절 수술을 받고 D병원에서 요양중인 이모(여·67)씨는 “다리랑 허리가 아파 저런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할 수가 없다”며 “세종병원처럼 불나면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5곳 병원의 또 다른 문제는 '인력 부족'이었다.
비상 상황에서 간호 인력 한명이 맡는 환자가 많았다. 의료법상 환자 6명당 간호사·간호조무사 1명을 배치해야 한다. 이날 밀양 요양병원 5곳은 평균적으로 간호인력 1명당 환자 7명을 맡아야했다. E요양병원은 1명당 환자 8명을 맡고 있다. E병원에서 요양 중인 남편을 병문안 온 박영순(55)씨는 "중증 환자들은 바로 옆에 간병인이 있어도 사고 가능성이 있다"며 "최근 병원에서 최저임금이 올라 야간 간병인력을 더 줄인다고 해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병원 관계자들은 “통상 주말에는 근무자수가 평일보다 적다”고 했다. 사고 당시 세종병원은 100여명의 환자가 있었는데, 의료 인력은 당직 의사 1명과 간호사·간호조무사를 포함해 총 9명으로, 의료 인력 1명당 환자 11명을 책임져야 했다. 물론 ‘불법’은 아니다. ‘적정간호인력’은 연간 총환자수 대비 의료진 인력으로 산정하기 때문에 세종병원의 26일 의료진 숫자만으로 ‘위법’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혹한기와 혹서기, 환절기에 노인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 26일 화재가 일어난 날도 밀양의 최저 날씨는 영하 10도 이하였다.
밀양 요양병원들의 특징은 다인실(7인실 이상)이 많다는 점. 환자 입장에서는 입원비가 싸고, 병원 입장에서는 적은 인력으로 환자를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 내 감염 위험이나 안전은 후순위로 밀린 것이다.
D요양병원 입원 환자 김모(87)씨는 “(26일) 세종병원에 불이 났을 때 3층에 있다가 구조대가 휠체어에 태워 대피시켜줘 살았다”면서 “이곳도 화재에서 안전할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과열경쟁→의료질 저하 악순환
요양병원 운영자들도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지급하는 진료수가(진료비)가 너무 낮아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는 월 60만~70만 원이라는 액수를 정해 놓고, 그 금액 범위 안에서 환자를 치료하도록 수가를 정했다. 요양병원은 진료나 치료 횟수나 원가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월 60만~70만 원에 해당되는 의료비만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할 수 있다.
‘노인 도시’를 찾아 병원이 여럿 생기면서 ‘출혈 경쟁’도 일어나고 있다. 밀양의 한 요양병원장은 “환자 유치를 위해 과당경쟁을 벌이면서 환자들에게 본인 부담금을 아예 안받는 경우도 있다"며 "수익이 계속 나빠져 서비스나 안전 관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요양병원에 '무동력 엘리베이터형 피난기' 의무화하자
공하성 경일대학교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요양병원은 피난약자들이 많기 때문에 특화된 안전시스템이 필요하다"며 "특히 초기 화재를 진압할 스프링클러를 반드시 설치하도록 해야 하고, 침상 환자도 이용할 수 있는 다수인피난장비(전기를 쓰지 않는 엘리베이터형 피난기)도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천재경 밀양보건소장은 “밀양에선 요양병원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때그때 땜질식 처방으로는 세종병원의 비극이 재발할 수 있다”며 “정부가 건축법을 따져보고 요양병원의 건설 기준과 안전 기준을 강화시키고 사후관리를 엄격히 해야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직접 관리감독에 나서야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세종병원은 앞서 '누전' 이력이 있었음에도, 병원직원이 자체적으로 소방점검을 계속해왔다.
임경범 대전과학기술대학교 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정부에서 건물의 안전점검을 좀 더 강화해서 감독할 필요가 있다"며 "작동기능점검은 건물 소유주가 스스로 하도록 되어있는데, 건물의 용도와 화재 발생 시 피해 정도에 따라 세분화해서 점검 기준을 달리 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