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가 특정 성향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 뒷조사 문건을 만들었다는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은 사실무근인 것으로 결론 났다. 앞서 법원 진상조사위도 작년 4월 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은 있었지만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발표했었다. 이후에도 법원 내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일부 판사들이 재조사를 요구해 작년 11월부터 67일간 다시 조사했지만 같은 결론이 나온 것이다.

이 의혹을 재조사한 법원 추가조사위원회는 22일 법관 내부망에 조사 보고서를 올리는 식으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행정처가 판사들의 뒤를 파서 인사에서 불이익을 주는 '블랙리스트'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행정처가 사법 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정리한 문건은 여럿 발견됐다. 추가조사위는 "부적절한 사법행정권 행사"라고 했다.

추가조사위에 따르면 행정처 컴퓨터 파일에선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와 대법원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추천 과정에서 특정 판사들의 성향을 분석한 문건이 나왔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소모임인 '인사모'(인권 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모임) 판사들의 활동 내용을 파악한 문건도 있었다.

또 대법원장이 추진하는 사법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댓글 사건 항소심 재판부의 동향을 정리한 문건도 나왔다. 특히 원 전 원장 재판과 관련해 작성한 문건에는 '청와대가 항소 기각(선거법 무죄)을 기대하며 법무비서관실을 통해 법원행정처에 (재판) 전망을 문의, 우회적인 방법으로 재판부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알렸다. 다만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예측이 어렵다는 입장을 알림'이라고 적혀 있다. 행정처가 청와대 요청을 받고 재판 관련 정보를 수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추가조사위는 "행정처가 재판에 관여하거나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행정처가 이런 문건을 만든 것 자체가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비칠 수 있는 소지는 있다. 그러나 법조계에선 문건대로 실행이 됐는지는 다른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행 여부 측면에서 보면 추가조사위의 발표 내용도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 추가조사위는 행정처가 동향을 파악한 일부 판사들에게 실제로 인사에서 불이익을 줬는지에 대해서는 '조사 범위 밖'이라며 언급하지 않았다. 추가조사위가 만들어진 것은 행정처에 '판사 블랙리스트'가 있는지를 가리기 위해서였는데, 조사위는 블랙리스트란 말도 꺼내지 않았다.

추가조사위는 행정처가 2016년 일선 법관들을 사법행정에 참여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든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선정 과정을 문제 삼았다. 행정처가 위원 후보자 명단 옆에 '강성(强性)' '판사 전용 (인터넷) 카페 개설자' 등 후보자 성향과 이력을 넣어 특정 판사들을 배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판사는 모두 위원으로 선정됐다. 최종 임명된 위원 34명 중 15명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불이익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발표에 빠져 있다.

행정처가 2016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 의장 선거 때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인 박모 판사와 경합하던 정모 판사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문건 역시 실행되지 않았다. 또 이후 박 판사가 본인이 원하던 지원장(支院長)으로 발령 난 사실은 발표에 빠져 있다. 행정처 문건에 등장한 판사들이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는지는 근무지 등을 확인하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데도 그런 내용은 뺀 것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항소심 재판부 동향 파악 문건에 대해서도 일각에선 반론이 나온다. 당시 항소심은 1심에서 무죄가 나왔던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행정처 문건에도 '우병우 민정수석이 선고 후 법원에 큰 불만을 표시했다'고 돼 있다. 법원 관계자는 "행정처가 청와대와 협의 후 실제 재판에 개입했다면 이렇게 됐겠느냐"고 했다.

추가조사위 발표를 놓고 판사들 의견은 둘로 갈라지고 있다. 일부에선 "사법행정권 남용이 확인됐다"고 하고 있지만 다른 편에선 "추가조사위가 블랙리스트와 관련 없는 별건(別件) 조사를 해 법원 갈등을 키우고 있다"고 하고 있다. 블랙리스트가 없으면 없다고 밝혔으면 될 일인데 이와 무관한 내용까지 밝혀 또 다른 논란만 남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