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서울 종로5가 뒷골목. 폭 3m 좁은 골목에 분홍색 2층 건물이 검게 그을린 채 있었다. '서울장 여관'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폴리스 라인이 쳐진 여관 입구에 흰 국화 20여 송이가 놓여 있었다. 건물 앞 경찰은 "동네 주민과 구청에서 놔두고 간 것 같다"고 했다.
전날 새벽 이 여관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중상자가 있어 사망자가 늘어날 수 있다. 20일 오전 3시 8분쯤 중국 음식점 배달 직원 유모(53)씨가 이 여관 출입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10명이 투숙 중이었고, 객실 8개는 모두 차 있었다. 유씨는 술을 마신 뒤 여관에 들어가 성매매 여성을 불러달라고 요구하다 거부당했다. 주인과 말다툼을 한 유씨는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사서 돌아왔다.
방화 직후엔 스스로 "불을 냈다"며 신고했다. 주인과 이웃이 소화기를 뿌렸지만, 불길을 잡지 못했다. 불은 출동한 소방대가 1시간 만에 진압했다. 경찰은 여관 근처를 서성이던 유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유씨는 21일 현존 건조물 방화 치사 혐의로 구속됐다. 경찰은 "유씨에게 전과가 있지만, 방화·주취폭력은 아니다. 정신병력은 없다"고 했다.
사망자 중에 박모(여·34)씨와 14세, 11세 두 딸이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전남 장흥군에 사는 박씨는 중학생·초등학생 딸들의 방학을 맞아 지난 15일부터 전국 각지를 여행하고 있었다. 여행 5일 차인 지난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저렴한 숙소를 알아보던 중 이 여관 105호에 짐을 풀었다. 다음 날 일정을 위해 일찍 잠이 들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박씨의 남편은 일 때문에 여행에 함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54년 된 이 여관은 벽돌·슬래브로 된 2층 건물로, 옥상에 가건물이 있었다. 유일한 대피로였던 입구 쪽에서 불길이 번져 투숙객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옥상에 창고 용도 가건물이 있어 위쪽으로 대피할 수 없었다.
투숙객 대부분은 주변 공장 등에서 일하며 장기 투숙하던 사람이었다. 2명은 2년 전부터 여관에 머물렀고, 다른 1명도 "장기 투숙하겠다"며 3일 전 들어왔다. 여관 하루 숙박비는 2만~3만원, 장기 투숙은 한 달에 45만원 선으로 알려졌다.
이 골목 100m 안에는 비슷한 여관이 10여 곳 더 있다. 20여 년 전까지는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르는 운동부 학생들이나 지방에서 물건을 떼러 온 상인들이 묵던 곳이었다. 지금은 주로 인근 시장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일용직·저소득층 근로자들이 장기 투숙한다. 한 여관 주인은 "아르바이트나 막노동을 하는 40~70대 남성이 많이 거주한다"고 했다. 이 동네에 40년 이상 거주했다는 한 주민(66)은 "주택은 거의 없고 창고로 쓰거나 비어 있는 곳이 많다"며 "서울 도심에 이런 곳이 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했다. 흔히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도 없다. 20여 분 걸으면 창신동 쪽방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