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3남 김홍걸·YS 차남 김현철, 민주당 입당해 '한솥밥'
김현철은 경남에서 김홍걸은 전남에서 자천타천 출마설 '솔솔'
한국 정치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최고 권력자 곁에는 늘 2인자가 존재했다.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가진 한국 정치 현실에서 역대 모든 정권에는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서 막후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실세가 존재했다. 주로 대통령과 가까운 정치적 동지나 친인척, 가신그룹 등이 이런 역할을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헌정사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막후권력들로 인한 불행한 역사가 반복됐다. 대통령 곁에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했던 막후실세들은 정권이 힘이 있을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힘’을 과시했지만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이 닥치면 각종 부패와 비리에 연루돼 나락으로 떨어졌다.
◇ 박정희의 쿠데타 동지…‘영원한 2인자’ 김종필
김종필(JP)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쿠데타 동지이자 처조카다. 김종필은 쿠데타 성공 후 초대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의장 등을 지내며 명실상부한 정권 ‘2인자’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김종필이 유력한 후계자로 부상하자 박 전 대통령은 극도의 경계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5년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겉으로는 2인자 타이틀을 달고 있었으나 권력 핵심에선 완전히 제외됐다. 2015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기밀해제해 최초 공개한 대통령 일일보고 문건에는 박 전 대통령이 김종필을 강력히 견제해 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서울의 봄’ 정국에서 김종필은 한때 김영삼, 김대중과 더불어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으나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된다. 1997년 DJP(김대중·김종필)연합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갔으나 2004년 총선에서 참패해 정계를 떠났다. 그는 정계를 은퇴하며 “정치는 허업(虛業·겉으로만 꾸며 놓고 실속이 없는 사업)”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16년 ‘김종필 증언록’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최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신년 인사차 예방하는 등 아직까지도 보수 진영에서는 적잖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 전두환의 ‘영원한 충복’ 장세동
전두환 정부의 최고 실세는 장세동이었다. 1966년 베트남 파병에서 전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나 연을 맺었다. 12·12사태 때 특수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참여했다. 5공화국 출범 이후 6년간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안기부장으로 재직한 그는 ‘5공 청산’ 때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주목받았다. 1993년에는 ‘용팔이 사건’(별명이 용팔이였던 조직폭력배가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한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5공 청문회장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고 말해 다시 한 번 전 전 대통령의 충복 임을 입증했다.
2002년 12월 16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중도 사퇴했다. 2004년 4월 17대 총선에서도 서울 서초을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 노태우 정부의 ‘황태자’ 박철언
노태우 정부에서는 영부인 김옥숙 여사의 사촌동생 박철언이 비선실세로 주목받았다. 그는 공천에 관여했고 국정 전반에 입김을 행사해 ‘6공의 황태자’로 불렸다. 박철언의 친인척들과 측근들은 ‘월계수회’라는 비선조직을 만들어 국정을 주물렀다. 청와대 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박철언은 후계자 대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옥고를 치렀다. 1993년 슬롯머신 업계로부터 6억원을 받은 혐의로 1년6개월의 형을 살고, 의원직까지 상실했다. 이후 김종필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해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됐으나 2000년 대구 수성갑에서 낙마한 뒤 정계를 은퇴했다.
정계를 은퇴한 후에는 변호사 사무실을 세워 운영하면서 대구경북발전포럼 이사장으로도 행보를 넓혔으며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 김영삼 정부의 ‘소통령’ 김현철
김영삼 정부에서는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위세를 누렸다. 그는 막후에서 인사와 공천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소(小)통령’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정부와 군, 검찰, 국영기업 등 요직에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한보 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추락은 시작됐다. 기업인으로부터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징역 1년 6월에 추징금 20억원을 선고받았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영입돼 국회의원 출마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두 차례 유죄 선고를 받았던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인 2017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했다. 최근에는 올해 지방선거에 경남도지사로 출마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김해갑과 김해을을 각각 지역구로 두고 있는 민주당 민홍철 김경수 의원이 경남도지사에 출마할 경우 그 빈 자리에 뛰어들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 김대중의 세 아들 ‘홍삼 트리오’
김대중 정부의 실세도 가족, 세 아들인 ‘홍삼 트리오(홍일·홍업·홍걸)’였다. 이들은 전 정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모두 비리에 연루됐다. 특히 당시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이었던 김홍업의 별명은 ‘100% 해결사’였다. 결국 그는 2002년 여러 기업에서 이권 청탁 대가 등으로 47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세 아들 중 최근 제일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물은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이다. 지난 대선 과정 문재인 캠프의 러브콜을 받고 영입인사로서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었다. 20대 총선 출마설도 제기됐으나 스스로 불출마 선언을 하고 백의종군했다. 이후 민주당에서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다. 최근에는 활발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활동을 통해 지지자 등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권에서는 올해 지방선거 전남도지사 후보로 그의 이름이 종종 거론된다.
동교동계의 맏형인 권노갑 국민의당 상임고문도 당시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집 앞에는 신년인사로 1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 핵심실세로 평가받던 권 고문도 한보 사건, 진승현 게이트, 현대 비자금 수수 등에 휘말려 3번이나 감옥에 다녀왔다. 그는 자기 묘비에 ‘김대중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 14자만 새길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노무현 정부의 '봉하대군' 노건평
도덕성을 강조했던 노무현 정부도 친인척 비리를 피해가지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둘째 형이었던 노건평씨는 ‘봉하대군’으로 불리며 정권 내내 구설수에 올랐다. 그는 2003년 초 인사개입설로 구설에 올랐고 2004년엔 당시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으로부터 연임 청탁과 함께 3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집행유예 2년)됐다. 2008년 세종증권 매각비리 사건으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2010년 8·15 특사로 석방됐다. 작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의 ‘눈물의 추도사’를 듣기도 했다.
‘좌(左)희정, 우(右)광재’라고 불릴 만큼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인정받던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지사도 각각 불법자금 문제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 전 강원지사는 현재는 민간 미래연구기관인 여시재(與時齋)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명박 정부의 ‘만사형통’ 이상득
이명박 정부에서는 ‘만사형통(만사가 대통령의 형을 통해 이뤄진다)’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모든 권력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에게 쏠렸다. 그가 경북 포항지역 정치인 모임인 ‘영포회’라는 비선 조직을 적극 활용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6선 의원에 국회부의장이라는 무게감까지 가졌던 이 전 의원은 정권 2인자를 자처했지만, 권력 사유화 논란에 끊임없이 휩싸이며 결국 2009년 정치 2선 후퇴를 선언해야 했다.
이 전 의원은 이명박 정부 막바지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다.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3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2012년 구속 기소됐다. 결국 1년 2개월을 복역하고 나왔다. 당시 저축은행 비리 수사는 대선자금 비리 문제로 이어지면서 한동안 정국을 흔들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포스코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대가로 특혜 뇌물을 챙긴 혐의로 기소돼 작년 11월 열린 2심에서도 1심과 같은 징역 1년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재판부는 고령인 이 전 의원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법정 구속하지는 않았다.
◇ 박근혜 정부의 ‘권력서열 1위’ 최순실
“대한민국 권력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박근혜 대통령은 3위다.” ‘정윤회 문건’을 작성했던 청와대 행정관 박관천 전 경정이 2014년 12월 이런 언급을 했을 때만 해도 이 말을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최순실은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로 활동하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박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과 국무회의 발언, 인사 내용 등을 사전에 받아보았다는 것 외에도 국가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딸에게 각종 특혜를 주기도 했다. 각종 인사와 이권에도 개입한 일도 추가로 밝혀져 ‘권력서열 1위’ 최순실은 결국 구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