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속담에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사물의 형상을 그와 유사한 글자와 연결하지 못하는 언어적 무지를 똥기는 말이다. 새삼 한글이라는 우리의 언어, 훈민정음 반포 이후 우리의 삶 전반에 웅숭깊게 갈마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말과 글자는 한 시대의 자화상을 드러내곤 한다. 시대와 사람에 따라 같은 언어라도 그 쓰임의 정도나 정신의 결기와 마음의 정감이 천차만별이다.
고통과 문제를 헤쳐나가는 방편을 범박하게 쓰는 우리 한글의 쓰임에서 찾아볼 때가 있다. 한마디 말이 갖는 천냥 빚의 청산은 과장된 레토릭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언어의 종요로움을 일깨운다.
일상의 언어를 가만히 그리고 골똘히 바라볼 때가 있다. 어느 해 늦겨울에 나는 산그늘에 얼마 남지 않은 잔설의 눈밭에 눈길이 머문 적이 있다. 얼마 안 있으면 저 하얀 눈밭은 눈석임물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게 아까워서 버려진 대빗자루로 잔설 밭에 크게 글자를 썼다. '님'이라는 글자였다. 문득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산골짝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으실 것만 같은 생각도 들었다. 투박한 글자였지만 그렇게 큰 글자 하나를 써놓고 보니 기꺼운 마음이 들락거렸다. 목적에서 놓여난 글자 하나가 봄이 올 때까지 며칠이고 산그늘에서 가만히 웃을 것만 같았다.
금보성 화가의 한글 연작은 줄기차고 듬쑥하게 한글이 지닌 다양한 형상의 미덕을 발산한다. 삶의 도처에서 부딪히고 발견하게 되는 것을 한글의 문자적 친근감으로 재해석하는 매력이 도저하다. 한글이 아니면 차마 드러내지 못할 마음의 뉘앙스를 그는 선험적으로 느낀 모양이다.
'한글 자화상'은 한글의 자화상인지 자화상에 깃든 한글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우리 몸과 얼에 갈마들어 있는 한글의 영묘함을 얼러낸다. 다양한 형태로 분열하고 조합되며 다시 너나들이하듯 모여 뜻과 소리를 전하는 한글은 자화상을 새뜻하게 일구는 영구한 화소(畵素)다. 소리글자, 즉 표음(表音)문자인 한글은 다른 언어에 비해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월등히 많다고 한다. 그만큼 최대한 자연과 마음에 가까운 언어다.
한글은 하늘이 땅에 내려와 즐거이 노니는 자음의 상형(象形) 같고, 땅은 그런 하늘이 능노는 바탕을 품는 모음의 냅뜰성이 있고, 사람은 천지간(天地間)의 숨탄것으로서의 신명과 흥취를 기호적으로 대변하는 듯하다. 한국인의 영혼에 표현의 여줄가리가 많은 한글이라는 헤모글로빈이 있기에 한국인 특유의 흥과 신명이 진작된다. 화가는 그런 한글의 뉘앙스를 화수분처럼 얼러내고 있다.
나른한 오후의 전철 칸에서 하품하는 사람의 입 모양은 그야말로 한글 이응(ㅇ)이다. 숫눈이 내린 겨울 숲의 나무들은 한글 모음들로 얽히고설킨 모임이다. 거기에 새들이라도 깃들면 자음을 얻은 모음의 나무들이 새삼 활기를 띤다. 기쁨과 사랑의 반열에서 보면 우리는 가끔 상대방의 손바닥과 손등에 혹은 적막한 등짝에 손가락으로 마음을 써본다. 화폭은 이렇게 생득적인 몸에 깃든다. 거기 진짜 손 글씨에 겨울인데 봄기운이 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