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보나르, 욕실의 누드, 1925년, 캔버스에 유채, 런던 테이트 미술관 소장.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는 흔히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후기(後期) 인상주의 화가로, 혹은 상징주의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이 화려한 도시의 외관을 그리는 데 치중했고, 후기 인상주의자들이 강렬한 색채와 형태로 내면을 표출하고자 했던 반면, 보나르는 소박한 집 안을 주로 그렸다. 상징주의자들이 그림 속에 비밀스러운 의미를 숨겨두고자 했다면, 보나르는 평범한 일상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처럼 장식적이고, 후기 인상주의처럼 내면적이며, 상징주의처럼 신비롭다. 하얀 욕조에 한 여인이 있다. 따뜻한 물에서 아른아른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눈앞을 가린 듯, 화면 전체가 뿌옇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과 함께 목욕 중인 여인의 다리도 흔들리는 것 같다. 그림 왼쪽을 보니 가운을 입은 남자가 지나간다. 그러나 회색 가운과 흰 점이 찍힌 커튼이 뒤섞여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이처럼 바스러질 듯 은근한 붓 터치, 중심 주제를 잘라낸 특이한 구도, 현실과 동떨어진 자유로운 색채가 어떤 ‘주의(主義)’로도 묶어 내기 어려운 보나르 작품의 특징이다. 욕조 속 여인은 보나르의 아내다. 그들은 1893년에 처음 만나 1925년에 결혼을 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보나르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등 내밀한 그녀의 모습을 반복해서 그렸다. 1942년, 그녀가 먼저 세상을 뜰 때까지 남긴 그림만 380점이 넘는다. 하지만 정작 보나르가 그녀의 진짜 이름과 나이를 알게 된 건 결혼을 한 다음이었다. 지금 소마미술관의 ‘테이트 명작전’에서는 이토록 비밀스러운 여인의 누드화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