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는 최근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 재건축 사업을 사실상 승인하며 조건을 달았다. "이 아파트는 미래 유산으로 가치가 있다. 일부를 보존할 방안을 찾으라"고 했다. 앞서 재건축 정비계획 심의 권한을 가진 시의 도시계획위원회 소위원회는 재건축조합 측에 팩스를 보냈다. "단지 중 1개 동과 (단지 중앙에 있는) 굴뚝을 남기라"는 내용이었다.
조합 측은 내용을 그대로 담아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보존할 동은 잠실대교 남단과 맞닿은 한강변의 523동으로 정해졌다. 한강이 내다보여 단지에서 입지가 가장 좋은 동이다. 높이로는 15층 중 4층, 길이로는 건물의 5분의 1을 남긴다. 활용 방안은 향후 정해질 설계안에 따라 결정된다. 아파트 주민들은 반발하고 있다. "시가 충분한 주민 동의 없이 일방적인 가치 기준을 내세워 사유재산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서울시가 초대형 아파트 단지의 재건축 사업 때 일부를 '미래 유산'으로 보존하라고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잠실주공 5단지는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후 최초로 허가받은 초고층 재건축 단지다. 최고 50층, 6401가구 대단지로 바뀐다. 2023년 입주 예정이다. 단지 내에 5성급 호텔도 들어선다. 단지 일부를 마이스(MICE·국제회의, 포상 관광, 컨벤션, 전시) 용도로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글로벌 단지로 탈바꿈하는 아파트 중심에 흉물을 남기게 됐다"고 한다. 지난 5일 아파트에서 만난 김모(69)씨는 "이 아파트는 지어질 때부터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현대식 아파트인데, 미래 유산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미래 유산 보존'의 대상 아파트는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 강남구 개포주공1·4단지 등이다. 반포주공1단지는 전체 66개 동 중 1개 동을 남겨두고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재건축 아파트가 내야 할 기부채납금 15% 중 일부를 1개 동을 남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남게 될 108동은 주거역사박물관이 될 예정이다.
이들 아파트 주민들은 시의 '유산' 지정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 최근에 내부 리모델링을 해서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40가구가 거주하는 5층 높이의 1개 동이 남는 개포주공1단지는 "집 안에 난방용 연탄아궁이가 있다"는 이유가 역사 보존의 근거 중 하나로 꼽혔다. 재건축조합 측에서는 "실제로 아궁이가 남아 있는 가구는 없다"며 "조합원 인터넷 카페에 최근까지도 항의 글이 올라온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재개발사업의 경우 '미래 유산' 보존이 가능하나 재건축 사업에까지 강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한다. 재건축 사업은 기반 시설이 양호한 아파트 위주로 주민이 주도해 시행하지만, 재개발 사업은 시가 사업 지구를 정해 도시 정비를 하는 것으로 공공성이 강하다. 이상명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재건축 단지라는 사유재산의 존치 여부를 행정 당국이 나서서 결정하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라고 말했다.
시에서는 '유산' 지정이 조합 측의 자율적인 의사에 따라 결정됐다고 주장한다. 시 관계자는 "잠실주공5단지는 시가 강제한 게 아니라 주민들이 '1개 동과 굴뚝을 남기겠다'고 계획서를 낸 것"이라며 "사유재산 침해가 아니라 도시의 주거 문화사를 보존하는 의미 있는 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