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6월 12일 오후 4시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강우방 학예사는 계림로(鷄林路) 발굴에 임하던 이종성 직원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3일 전 발굴을 시작한 14호묘에서 금제 허리띠가 출토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규모가 작은 무덤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반신반의하며 한걸음에 달려갔다.
무덤 주인공의 허리 부위에서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황금 장식은 흙 속에 절반 이상 파묻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연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발굴 소식은 삽시간에 경주시내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이튿날 한 신문에 '경주고분서 순금허리띠 발굴, 해방 후 처음'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자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서둘러 유물을 수습, 박물관으로 옮긴 다음 흙을 말끔히 제거하니 허리띠가 아닌 황금 보검이었다.
이 보검은 '국보급' '신라 공예 문화의 정수'라는 찬탄을 한몸에 받았고 7월 25일 발굴된 천마총 금관과 쌍벽을 이루는 유물로 평가받았다. 발굴이 끝나고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 보검은 신라산이 아닌 서역산으로 밝혀졌다. 그에 따라 '신라 금속공예품의 지존' 자리를 잃게 되었지만 그 대신 글로벌 신라의 징표로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서역산 보검이 어떤 과정을 거쳐 머나먼 신라까지 전해졌는지 등 계림로 보검을 둘러싼 여러 의문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 보검은 5~6세기 신라인들이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수용한 새로운 문물이 신라의 잠재력을 일깨워 신라인 스스로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이라는 담대한 지향을 세우는 데 촉매가 되었음을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