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기 법무부 장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문무일 검찰총장, 이철성 경찰청장이 28일 오후 6시 서울 강남의 한 영화관에서 영화 '1987'을 함께 관람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공약인 검경 수사권 조정의 당사자들이다. 그동안 한자리에서 만난 적이 없었는데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다 모였다.

동반 관람은 박 장관이 김 장관에게 먼저 제안했다. 박 장관과 김 장관이 각각 검찰총장, 경찰청장에게 연락했다. 영화표 예매 등 실무는 법무부 인권국이 맡았다고 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황희석 법무부 인권국장이 13일 영화 시사회에 다녀와 장관에게 '참 좋은 영화'라며 관람을 권하면서 행사를 기획했다"고 했다. 황 국장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대변인·사무차장 출신이다. 지난 9월 비(非)검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인권국장에 임명됐다. 법무부와 행안부는 지난 22일부터 영화 관람 계획을 알리며 홍보에 나섰다. 28일엔 보도자료까지 냈다.

“영화 ‘1987’ 보러 왔어요” - 28일 오후 서울 강남역 근처 한 영화관에서 영화 ‘1987’을 관람하기 전 문무일 검찰총장,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박상기 법무장관, 이철성 경찰청장(왼쪽부터)이 손을 마주 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987’은 6월 민주 항쟁의 계기가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소재로 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검찰과 경찰 역사에 오점(汚點)으로 남은 사건이다. 박종철군이 1987년 1월 14일 물고문을 당하다 숨지자, 경찰은 다음 날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다 고문 경찰관들을 포함해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까지 9명이 구속됐다.

영화 속 검찰은 경찰의 사건 은폐를 막는 의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검찰은 당시 박종철군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火葬)해 사건을 은폐하려던 경찰을 막고 부검을 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고문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 검찰도 처음엔 외부 압력에 밀려 서둘러 수사를 마무리하려 했다. 언론과 시민단체 등이 새로운 사실을 폭로할 때마다 4차에 걸쳐 수사를 반복해 '부실 수사'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4명의 기관 수장(首長)들은 나란히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영화를 봤다. 이철성 청장은 영화 말미에 이한열군이 경찰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이 나오자 훌쩍이기도 했다. 영화가 끝난 후 박 장관은 "민주주의가 약화되면 국가권력이 언제든 폭력성, 잔인성을 나타낼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아우성"이라고 했다. 문 총장은 "다 우리 역사고 배워나갈 부분"이라며 "국민 염원을 배우고 깨닫고 간다"고 했다. 이 청장은 "잘못된 공권력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였다. (경찰) 내부적으로 또 같이 볼 기회를 준비 중에 있다"고 했다.

검경의 부끄러운 과거를 다룬 영화를 수장들이 이벤트성으로 단체 관람에 나서자 각 기관 내부에선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한 차장검사는 "행사 취지가 '과거에 대한 반성'이라면 조용히 보고 입장을 내면 될 일"이라며 "떠들썩하게 홍보하고 가는 건 낯부끄럽다"고 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영화를 봤는데 픽션이 섞여서 경찰이 실제보다 훨씬 악랄하고 잔인하게 나온다"며 "청장이 꼭 그 자리에 갔어야 했나 싶다"고 했다.

영화 '1987'은 실제 사건에 기반했지만 여러 곳에 허구가 포함돼 있다. 그런 영화를 보고 이 정권 인사들이 논평을 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을 준비하던 작년 12월 원전 폭발을 다룬 영화 '판도라'를 보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 "한국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지난 8월엔 가수 김광석씨 타살 의혹을 다룬 영화가 주목을 끌었다. 김씨 딸 타살 의혹으로까지 이어져 여당 의원이 김씨 아내를 고발하기도 했다. 경찰 수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