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노동권, 안전, 생태, 사회적 약자 배려, 양질의 일자리, 대·중소기업 상생 협력 등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사회적가치가 경제 운영 원리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의원 시절 대표 발의했던 '공공기관의 사회적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이하 사회적가치 기본법)'에 등장하는 문구다. 문 대통령은 '사회적가치'를 '사회적 경제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실현'으로 정의하고, 이를 공공기관 평가와 민간 기업 역할에 반영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새 정부 출범 직후 산업계의 핵심 어젠다로 급부상했다. 전문가들은 "경영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가 왔다"고 입을 모은다. 문재인 정부 100대 과제 심층 분석, 제4편은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향방이다.
◇사회적 가치 폭풍이 몰려온다
최근 공기업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숫자는 '35'다. 향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사회적가치 항목이 100점 만점에 최대 35점까지 반영될 것이란 소문 때문이다. 실제로 행안부는 지난 10월 지방공기업의 경영평가에 사회적가치 배점을 35점 내외로 확대 개편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기재부의 공공기관 경영평가 지표상 5점 내외에 불과했던 '전략 기획 및 사회적 책임' 점수도 대폭 향상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과제에 '공공기관의 사회적가치를 반영한 경영평가 실시'가 포함되면서 이러한 변화는 일찍이 예고됐었다.
발 빠른 공기업들은 TF를 꾸려 사회적가치 스터디에 돌입했다. 총 4조8017억원의 연구 예산을 운영하는 한국연구재단(이사장 조무제)은 지난 20일 공공기관의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열린 혁신 협의체를 출범, 거버넌스 개편,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 등 사회적가치를 반영한 중장기 로드맵을 마련했다. 이해관계자 소통과 투명성 강화를 위해 홈페이지에 '열린 혁신 소통 플랫폼'도 마련했다.
반면 "설립 목적상 공기업은 공공성을 추구하는데, 별도의 사회적가치 활동을 시도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한 공기업은 기재부의 경영평가 지표가 발표되기 전까지 사회적가치 연계 작업을 올스톱한 상태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지난 20일 공공기관 최고경영자(CEO) 워크숍에 참석한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공공기관 평가 시스템을 사회적가치를 중심으로 환골탈태시키겠다"고 강조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12월 마지막 주쯤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통해 사회적가치 지표가 확정될 예정이며, 이후 편람을 통해 공개될 것"이라고 밝혔다.
라영재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공공기관연구센터 평가연구팀장은 "사회적가치 실현이란 인권·노동·반부패·품질경영·윤리경영·상생 등 사회적책임(CSR)을 강화하는 것으로, 자선 활동 및 사회공헌과 동일시해선 안 된다"면서 "배점과 가중치에 연연하기보다는 그동안 사회적 책임 요소 중 놓쳤던 부분을 보완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부처별 업무 및 정책평가에도 사회적가치가 반영될 전망이다. 올해 정부 업무평가 지표에 일자리 창출(배점 20점)을 신설한 국무조정실은 내년도 평가에 사회적가치를 반영하기 위해 연구 용역을 준 상태다. 행안부는 사회적가치를 반영한 평가 지표를 만들어 실시간 이행률을 볼 수 있는 온라인 시스템을 계획 중이란 후문이다. 윤태범 한국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교수는 "효율성·정량적 성과보다는 정책을 만들고 실행할 때 사회적가치를 얼마만큼 고민하고 반영했는지가 관건"이라며 "부처별 예산과 업무가 최종 확정되는 내년 초부터 본격적인 평가 지표 발표 및 논의가 거세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회적 책임 둘러싼 투자자·소비자 모니터링 대비해야
기업 지배구조 개선, 사회책임투자 확대, 상생 역시 문재인 정부의 핵심 CSR 키워드로 꼽힌다. 612조원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기관 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 시점을 내년 하반기로 공식화하면서,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실시된 국민연금의 '책임투자 및 스튜어드십코드 관련 중간보고'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사외이사(감사) 후보 추천 ▲이사회 및 집행임원과의 사전 비공개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강화 ▲개선이 시급한 중점 대상 회사 공개 ▲수탁자책임위원회(가칭)의 확대 개편으로 독립성·견제·책임투자 전문성 강화 ▲전체 의결권 행사 내역 및 과정 공개 ▲최소 연 1회 주주 활동 내역 공시 ▲책임투자 규모를 주식〈채권〈다른 자산군으로 단계적 확대 ▲ESG 평가체계 구축 및 ESG 평가보고서 작성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이재광 ESG모네타 대표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이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 자체를 열지 않아 문제가 됐는데, 이번 중간보고에 개선 방안이 다소 부족해 보였다"면서 "투자위원회가 중요한 안건의 경우 심의위원회에 '의견을 구할 수 있다'는 임의규정을, '의견을 구해야 한다'는 강행규정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 기금정책분석실 관계자는 "연내에 최종 연구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복지부 기금운용위원회에 보고하고 확정된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향후 대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 구조) 등 비재무 정보 공시 수준이 기업 신뢰를 좌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스튜어드십코드가 도입되면 기관 투자자들이 기업의 ESG 정보에 따라 투자 여부 및 주주 행동을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 실제로 지난 9월 국민연금은 59%의 지분을 가진 신대구부산고속도로의 통행료 수납 용역업체 비위 행위를 고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시작했다. 현재 한국의 책임투자 규모는 총 7조8650억원(2015년 말 기준)으로, 중간보고에 따르면 2019년까지 약 11조4400억원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이에 대다수 기업의 IR팀에서 CSR팀에 협조를 구하는 등 ESG 데이터 관리에 돌입했다. A기업 CSR 담당자는 "모 기관 ESG 평가 점수가 낮아 확인해보니 IR팀에서 CSR 정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자료를 넘겼더라"면서 "향후 IR팀과 협력해 재무·비재무 정보에 대한 면밀한 데이터 관리와 통합보고서 발간을 검토 중"이라고 귀띔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 사무국장은 "향후 국민연금이 ESG 수준이 낮고 문제가 많은 블랙리스트 기업을 공개하면 그 여파가 투자자·소비자 등에게 확산될 것"이라며 "특히 배임·횡령·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공정위에 적발된 기업들부터 국민연금 등 기관 투자자들의 경고 및 주주권 행사가 시작될 텐데, 과거와 주주총회 분위기가 사뭇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상생과 관련해선 '협력이익배분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는 대기업이 협력사에 판매 수입, 순이익, 목표 초과 이익, 임금 등을 공유하는 제도로, 2020년까지 200개 기업으로 확산하는 계획이 국정 과제에 담겼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내년 2월쯤 협력이익배분제 모델을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