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의 대다수는 지하철역에서 인도(人道)로 올라가는 상행(上行) 방향이다. 계단 내려가는 것이 힘든 이들을 위해 서울시가 일부 에스컬레이터를 하행(下行)으로 바꿨다. 그러자 "상행 에스컬레이터를 선호하는 사람이 더 많다"며 항의하는 전화가 빗발쳤고, 서울시 계획은 무산 위기에 놓였다. 에스컬레이터 운행 방향 변경 사업을 두고 "시민 편의 시설은 꼭 다수의 결정에 따라야 하느냐"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에스컬레이터 운행 방향 변경 무산위기

서울 지하철 5호선 우장산역은 1번과 2번 출구가 같은 인도(人道) 쪽에 나란히 놓여 있다. 출구마다 1대씩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모두 상행 방향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20일 2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하행으로 바꿨다. 지하철을 타려는 노인 중에 "계단 내려갈 때 무릎이 더 아프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민원 전화가 잇따랐다. "계단 오를 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진행 방향을 왜 바꾸냐"는 것이었다. 민원인은 주로 출퇴근 시간 이 역을 이용하는 중·장년층이었다고 한다. 결국 우장산역은 닷새 만에 2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상행으로 바꿨다.

20일 상행 에스컬레이터만 설치된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1번 출구에서 한 노인이 난간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서울시는 계단 내려가는 것이 힘든이들을 위해 일부 에스컬레이터를 상행에서 하행으로 바꿨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시범 운행하던 4곳 중 3곳을 다시 상행으로 되돌렸다.

서울 지하철 1~9호선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는 총 2190대. 양방향 에스컬레이터를 제외하고 한 곳에 한쪽 방향만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는 156대다. 이 가운데 141대가 상행 전용이다. 한 방향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70개 역사(驛舍) 가운데 상행 전용만 운행하는 곳이 57개다. 서울시는 우장산역을 포함해 증산역·망원역·수락산역 등 총 4개 역에서 일부 에스컬레이터를 시범적으로 하행으로 바꿨다. 변서영 서울시 디자인정책과장은 "하행 에스컬레이터를 선호하는 이용객이 적지 않다"며 "나이와 성별, 신체 조건에 상관없이 다양한 이용자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집이나 직장에 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늘 일정한 출구를 이용한다. 에스컬레이터 진행 방향이 하행으로 바뀐 출구를 이용하던 시민들이 민원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던 이용객이 안내문을 읽지 못하고 하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 밖으로 나가려다 넘어질 뻔한 사고도 있었다. 증산역 역무원은 "안내문도 붙이고 역무원이 직접 나가서 계도하기도 했지만, 무심코 타는 고객들을 일일이 막기 어려웠다"고 했다. 결국 시범 운행 한 달이 채 안 돼 지하철역 4곳 중 수락산역만 제외하고 3곳은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상행으로 되돌렸다.

서울시는 "출구가 같은 인도에 있거나 횡단보도로 연결된 곳을 시범 선정해 에스컬레이터 방향을 바꿔 시민 불편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반발에 부딪혔다"며 "몇십m만 돌아가면 상행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는데, 한번 익숙해진 시민들은 조금의 불편도 감내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했다. 실제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은 예전부터 2번 출구는 상행, 3번 출구는 하행으로 에스컬레이터가 문제없이 운행되고 있다. 두 출구는 8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용객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잘 이용하고 있다.

시민 편의 시설, 다수냐 vs 소수 배려냐

서울시가 28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사전 조사에서 189명(67.5%)은 에스컬레이터 상행을 선호했지만 87명(31%)은 하행을 선호했다. 시 관계자는 "시범 운행 중 모니터링을 했을 때도 4명 중 1명 정도는 하행으로 바꾼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했다"고 했다. 하행 에스컬레이터를 더 선호한다는 김모(72)씨는 "(나는) 내려갈 때마다 무릎이 시리다. 젊은 사람들은 조금만 더 걸어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전문가들은 계단을 내려갈 때 무릎 등 신체에 가해지는 압력이 높고 낙상 위험이 크다고 지적한다. 박관규 신촌세브란스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어느 쪽이 더 어렵다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관절염으로 연골이 찢어져 있는 환자의 경우에 계단을 내려갈 때 더 악화할 수 있다"면서 "계단을 내려갈 때 더 힘들어하는 환자 분도 많다"고 했다.

반면 "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지나친 행정"이라는 비판도 있다. 광화문역을 자주 이용하는 직장인 임모(32)씨는 "계단을 올라갈 때 더 힘들어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면서 "내려가기가 어려운 소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