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 파괴자라고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지난 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만난 영국 그래픽 디자이너 네빌 브로디(60)는 자신에 대한 평판에 손사래를 쳤다. 그는 문자를 주요 소재로 하는 타이포그래피 분야의 세계적 디자이너다. 문자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파격적 스타일은 '해체주의'로 불렸고 기존 규범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평가받았다. BBC방송 웹사이트 로고, 더 타임스 제호(題號)를 디자인했고 현재 영국 왕립예술학교(RCA) 커뮤니케이션 아트 학장을 맡고 있다. 지난주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강연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만난 디자이너 네빌 브로디(왼쪽 사진). 그는“같은 셰익스피어 작품도 어떤 서체로 쓰느냐에 따라 달리 읽힌다”고 말했다. 브로디가 디자인한 서체 '삼성원(Samsung One)'이 적용된 스마트폰(오른쪽 아래 사진). BBC 웹사이트 로고는 간결하고 힘 있게 디자인했다.

브로디는 "나는 시스템을 만들 뿐"이라고 했다. "타이포그래피와 아이콘, 색채 같은 시각 요소로 스토리텔링 체계를 만들어 기업이 자기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디자이너는 이런 요소로 기반을 잘 다져야 비로소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죠."

브로디가 일약 스타로 떠오른 1980년대 후반은 수작업에 의존하던 디자인에 컴퓨터가 본격 도입된 시기였다. 그는 "지금은 디지털이 새로운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고 했다. "인쇄 매체를 전혀 읽지 않는 세대가 등장했지만 타이포그래피의 역할은 커질 겁니다. 창의적인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그는 "스마트폰 화면부터 각종 제품, 포장, 건물 외벽의 초대형 문구까지 타이포그래피가 쓰이는 곳이 점점 늘어난다"며 "디자이너에게는 다양한 규모를 소화할 수 있는 스케일(비례)에 대한 감각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손 글씨가 주목받기도 한다.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자필 사과문이 대표적이다. 브로디는 "손 글씨는 진심을 담는 소통의 수단이지만 타이포그래피보다 더 진실된 것은 아니다"고 했다. 똑같은 단어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 하지만 꼭 손 글씨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브로디는 "한국에 40번 넘게 왔다"고 할 정도로 한국 기업과 활발하게 협업해왔다. 스마트폰을 비롯해 삼성전자 제품에 적용되는 서체 '삼성 원', 한국타이어 로고가 그의 작품이다.

브로디는 "디자인에서도 앞서가는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면서도 "대부분 기업이 디자인의 가치를 깨닫는 단계로는 아직 진입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한국 기업들은 유교적인 위계질서가 강해요. 위에서 뭔가 결정하면 모두 따르는 분위기를 쉽게 볼 수 있지요. 물론 강점도 있지만, 디자인에서는 이런 문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기업이 성공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