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가 우리 땅에 들어온 지 2000년이 지났는데도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도가 없었다. 공자를 무조건 높일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맞게 이해해야 한다. 또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정확한 지금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중문학자인 조명화(62) 전 서원대 교수가 '현대 한국어판 논어 정본'을 표방하는 '논어역평'(현암사·전2권)을 펴냈다. 20편(篇)의 논어 본문을 세심한 우리말로 옮긴 뒤 방대하고 자세한 주석과 주석의 주석을 붙이고 저자의 의견을 평설로 밝혔다.
동양의 대표 고전인 논어는 전통시대부터 수많은 주석과 번역이 나왔다. 우리말로 간행된 것도 100여종에 이른다. 이미 논어가 차고 넘치는데 또 하나의 번역·주석서를 보탠 데 대해 조 교수는 "유교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주체적인 극복이 없었고 이제 복고적 경향마저 나타나는 상황에서 비판적 유교 점검이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명화 교수가 이런 문제의식에서 논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89년 서울대 중문과에서 '돈황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였다. 먼저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 정약용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 등 대표적인 논어 주석서 12종을 10년에 걸쳐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을 알기 위해 예기(禮記)를 비롯한 유교 경서를 독파한 뒤 번역을 시작했다. 2014년 학교를 명예퇴직한 뒤에는 이 일에 전념했다.
'논어역평'의 특징은 공자를 '재상으로 발탁되기를 평생 열망했던 정치 지망생'으로 보는 것이다. 조명화 교수는 "후대의 유가(儒家)는 공자를 철학자나 수신주의자, 사회변혁을 꿈꾼 운동가로 만들었지만 실제의 공자는 그런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구질서 회복이라는 기치 아래 입신(立身)을 꿈꾸었고 제자들은 그 꿈에 합류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공자의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 것은 진(晉)나라 가신(家臣) 필힐(佛月兮)이 반란을 일으킨 뒤 공자를 초청했을 때였다. 제자 자로(子路)가 반대하자, 공자가 답한 내용을 논어역평은 이렇게 옮겼다.
"아무리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 단단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 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러하다. 나는 필힐에게 가더라도 결코 바뀌거나 물들지 않아. 그리고] 내가 왜 조롱박[같은 신세]이어야만 하니? 왜 [조롱박처럼] 매달리기만 하고 먹을 수는 없[는 신세로 삶을 마쳐]어야만 하니?"[양화 제17편 7장]
공자가 읍(邑) 정도를 장악한 하급 반란자의 초청을 수락하려 한 것은 그가 당시 권력자로부터 외면당했으며 그대로 인생이 끝날지 모른다는 초조감에서 나온 것이고 공자가 고관을 지냈다는 후세의 설화가 엉터리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조 교수는 설명한다.
논어역평은 오랫동안 수신 규범으로 이해돼 온 부분도 뒤엎는다. "많이 듣되 미심쩍은 부분은 빼고 나머지만 조심스럽게 발언하면 실수는 적을 거야(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많이 보되 확실하지 않은 것은 빼고 나머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하면 뉘우침은 적을 거야(多見闕殆 愼行其餘則寡悔). 말에 실수가 없고 행실에 뉘우침이 없으면 녹(祿)은 그 안에 있단다.(言寡尤行寡悔祿在其中矣)"(위정 제2편 18장)는 공자의 말은 '말 실수하지 않고 후회할 짓 하지 않으면 공직생활을 무난하게 할 수 있다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자세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한다.
조명화 교수는 "동·서양을 모두 꿰뚫고 회통(會通)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공자를 성인(聖人)으로 만든 윤색을 빼고 본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