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22일 규슈(九州) 하카타(博多)항에 도착하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탐방의 경험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죠."
이다운(49) 원광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30년 전의 역사 탐방을 클로즈업 사진처럼 묘사했다. 부두를 가득 메운 일본 시민과 교포들이 쌀쌀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부산에서 온 8000t급 여객선 '선샤인 후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쿠오카(福岡)시 소방국 관악대가 '아리랑'을 연주하는 가운데 840명 대규모 탐방단이 배에서 내렸다. 그중 140명 정도가 대학생이었다.
처음 밟아 본 일본 땅에서 펼쳐진 역사 탐방은 이 교수에게 한국과 일본의 고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져다줬다. 학문과 삶이 모두 바뀌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고, 백제와 고대 일본의 교류사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가 된 것이다. 당시 이 탐방 이름은 '일본 속의 한민족사'. 그때 참가한 대학생 중에서 역사학자가 된 사람이 다섯이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해외 역사 탐방 프로그램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이 30주년을 맞았다. 1987년 이 탐방단 일원이었던 스무 살 남짓 대학생들은 이제 오십 줄에 접어들었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장년층이 됐다.
이들 중 일곱 명이 30년 만에 다시 모였다. 이다운(당시 원광대 사학과 1년) 교수, 양정석(49·고려대 사학과 2년) 수원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종일(50·서울대 국사학과 2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가정준(50·한국외대 법학과 2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인권(50·한국외대 일본어과 2년) ㈜LF 상무, 음악학원 원장 이지현(51·추계예대 성악과 2년)씨, 조정훈(51·서울대 서문과 3년) 조선일보사 총무팀장이다. 3일 조선일보 편집동 회의실에서 모인 이들은 "30년이 지났는데도 금세 얼굴을 알아보겠다"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1987년 12월 21일부터 5박 6일 동안 펼쳐진 제1회 탐방은 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와 후나야마(船山) 고분을 탐방한 뒤 신칸센(新幹線)을 타고 교토(京都), 나라(奈良), 아스카(飛鳥), 오사카(大阪)를 거쳐 고베(神戶)에서 배를 타고 귀국하는 코스였다. 가정준 교수는 "아직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었고 김성호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 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 같은 책을 통해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때여서 굉장히 지원자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인터넷도 없던 시기에 첫 사고(社告)가 나간 뒤 2~3일 만에 모집이 마감될 정도였다.
양정석 교수는 "그때까지 해외 탐방이라면 산업 시찰이나 연수처럼 '외국에서 배워 오자'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이 탐방은 완전히 달랐다"고 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옛 역사를 찾자는 발상의 전환이자 보기 드문 본격 문화 탐방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한국인이 한꺼번에 일본을 방문한 것은 아마도 조선통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NHK를 비롯한 일본 언론들이 몰려들었다. 버스 20대가 개발이 덜 된 좁은 유적지로 들어갈 때마다 주변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처음엔 여행 기분으로 떠났지만 유적지 탐방을 거치며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데 이들의 회상이 일치했다. 전문가의 선상 강연을 들은 뒤 한반도 유물과 비슷한 후나야마 고분 유물, 우리의 반가사유상과 똑 닮은 일본 국보 제1호 목조 반가사유상을 접하며 조금씩 진지해지더니 오사카 근처의 기차역인 '백제역(百濟驛)' 앞에선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자기 조상이 백제인이라는 걸 이렇게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거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기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거죠."(김인권 상무) 김종일 교수는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같은 당시 일본의 최고급 문화가 백제를 통해서 들어갔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더 이상 일본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대할 수 있었다"는 것을 탐방의 가장 큰 성과로 들었다. 역사를 연구하면서도 한 나라를 벗어나 세계사적 관점이라는 시야를 지닐 수 있었고(김종일 교수), 깨끗하고 친절한 일본인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점을 주의하게 됐다(이지현씨)고도 했다. 일본인과 우정도 많이 쌓았다. 고베항을 떠나던 마지막 날 배 위에서 색종이 테이프를 던지면서 석별의 정을 나눌 때 재일교포 가이드 한 명이 엉엉 울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