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은 돌고 돈다. 지금 이 말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건 남자들의 바지통이다. 유행에 둔감한 중년 남자들까지 몸에 날씬하게 달라붙는 '슬림핏(slim fit)' 바지가 한동안 '대세'이더니 어느새 통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패션계에서는 최근의 슬림핏 유행을 이끈 주인공으로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을 꼽는다. 그는 2000~2007년 디오르 옴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내며 모델 몸매가 아니고서는 감히 걸치기 어려울 만큼 파격적으로 날씬한 남성복을 선보였다. 이런 흐름에 맞춰 바지통도 점점 좁아져 온 지 10여년. 이제는 여유 있는 실루엣의 바지들이 남성복 패션쇼의 주인공이 됐다.

편안한 캐주얼부터 재킷 아래 받쳐 입는 바지까지 다양한 '와이드(wide·넓은) 팬츠'가 나오는 중이다. 소재도 눈여겨볼 만하다. 올가을 주목받고 있는 벨벳이나 코듀로이 소재로 풍성하고 우아한 맛을 한껏 끌어올린다. 도톰한 스펀지를 연상시키는 합성섬유 '네오프렌'으로 독특한 느낌을 준다.

①와이드 팬츠를 착용한 배우 공유. 검은 재킷에 흰 셔츠가 다소 딱딱할 수 있지만, 여유로운 바지 덕에 전체 옷차림이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 ②올가을·겨울용으로 나온 와이드 팬츠. 가죽 재킷에 매치한 오디너리피플. ③잔잔한 체크무늬 슈트로 선보인 조르지오 아르마니.

패션의 여러 흐름이 겹친 결과다. 우선 스포츠 의류, 스트리트(길거리)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이 스타일을 대표하는 옷 중 하나가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를 닮은 '트랙 팬츠'다. 여기에서 영향을 받아 바지가 운동복처럼 편안하고 헐렁해진다.

통 넓은 바지가 이미 유행한 여성복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성별·연령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보더리스(borderless)' 역시 최근 패션 디자인의 화두다. 한 치수 큰 옷을 입은 듯한 '오버사이즈(oversize)'의 인기도 한몫했다. 점차 풍성해지는 코트나 재킷의 실루엣을 바지 디자인도 닮아간다.

패션보다 더 큰 범주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는 분석도 있다. LF 질스튜어트뉴욕 류제혁 디자인실장은 "이른바 '휘게(hygge) 라이프'가 주목받으면서 남성복에서도 여유로운 느낌의 바지가 인기를 끈다"고 했다. 휘게는 일상의 여유와 행복을 뜻하는 덴마크어로, 편안함과 안락함을 중시하는 북유럽 특유의 문화 코드로 주목받고 있다.

보통 남자들이 슈트나 재킷에 입는 바지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주름 바지'가 대표적이다. 바지 앞쪽에 1~2개의 주름을 넣어 공간을 둔 바지로, 실루엣과 다리 움직임이 그만큼 여유롭다. 날씬한 바지가 유행하면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최근 남성복 전문 편집매장 등을 중심으로 재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남자들 바지 모양이 양극단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빌린 옷처럼 크게 입은 바지가 패션에 무심한 한국 남자들의 유니폼으로 통했고, 그 반작용으로 최근에는 짧고 날씬한 바지만이 멋쟁이의 자격 조건처럼 여겨졌다. 이제 주름의 수, 밑위 길이 등 디테일(세부 요소)이 조금씩 다른 바지를 취향대로 입게 된 것이다.

통 넓은 바지를 멋지게 입으려면 기장을 신경 써서 맞춰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슬림핏 바지보다 살짝 길게 입는다. 남성복 디자이너 홍승완씨는 "폭 좁은 바지를 보통 복사뼈 언저리까지 입는다면, 넓은 바지는 밑단이 구두에 닿아 주름이 살짝 잡히도록 입으면 보기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