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정말 멋지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잖아요!"

1986년 KBS에서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 앤 셜리가 한 말이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워킹맘 이혜리(37)씨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이 대사가 마음에 들어 얼마 전 50부작짜리 '빨강머리 앤 DVD 전집'을 구매했다. 퇴근 후에 두 자녀와 함께 거실에 앉아 빨강머리 앤을 보는 것이 요즘 취미다. 이씨는 "어렸을 때 별생각 없이 봤던 만화에 이렇게 가슴에 와 닿는 명대사가 많은지 몰랐다"며 "80년대 긍정의 아이콘 빨강머리 앤이 난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며 내일을 버틸 힘을 얻는다"고 했다.

1980~1990년대 어린이를 사로잡았던 애니메이션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잊혔던 만화 속 주인공들을 불러낸 이들은 이제는 대부분 어른이 된 '밀레니얼 세대'(198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 위로와 충고의 목소리를 담은 콘텐츠들이 쏟아지듯 나오는 트렌드에 질린 이들이 고전 애니메이션이 주는 담백한 위안의 메시지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은 요즘 밤이 되면 어른들을 위한 채널로 변한다. 투니버스에서는 과거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 '세일러문' '보노보노' '심슨네 가족들' 등의 원작이나 리메이크작을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을 고려해 밤 9시 이후 시간대에 편성하고 있다. 또 다른 애니메이션 채널 애니원 역시 밤 8시 이후에 '엄마 찾아 삼만리'나 '톰 소여의 모험' 같은 1970~1980년대 작품을 편성했다. 투니버스 관계자는 "보노보노는 30대 직장인, 세일러문은 20~30대 여성의 시청 비중이 높다"며 "주로 부모와 아이가 같이 TV를 보는 밤 시간대에 과거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을 집중 편성한다"고 했다.

서점가에서도 고전 애니메이션 열풍을 타고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다. 애니메이션 속 명대사를 인용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 대표적. 지난해 7월 출간된 이후 여성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지금까지 27만부가 넘게 팔렸다. 이와 비슷한 형식의 에세이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역시 올해 4월 출간된 이후 계속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들며 판매 부수 10만을 돌파했다. 이 책을 쓴 김신회 작가는 "저성장과 취업난 등으로 새로운 문화를 누릴 여유가 없는 밀레니얼 세대가 과거에 즐겼던 익숙한 즐길 거리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에서도 고전 애니메이션의 명장면·명대사를 모아놓은 편집 영상이 인기다. 유튜브에 '애니 명대사'를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만 약 4만개. 주옥같은 만화 주인공들의 명언이 쏟아진다. "꿈은 도망가지 않아. 도망가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야."(짱구는 못 말려)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곰돌이 푸) "포기하면 거기서 시합 종료예요."(슬램덩크) "노인들하고 한 약속은 잊어버리는 거 아니야. 젊은이들은 다음 달, 내년도 있겠지만 노인들에게는 지금뿐이라고."(보노보노)

만화평론가인 박석환 한국영상대 교수는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렸던 도덕 규칙이나 사회 규범을 재확인하려는 목적으로 교훈적인 성격이 강한 옛날 애니메이션을 찾는 이들이 많다"며 "화려한 화면에 복잡한 스토리 구조를 가진 요즘 애니메이션과 달리 매회 서사 구조가 비슷하고 화면 피로감이 덜해 '멍 때리기'용으로 찾는 어른들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