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200여 나라 국기 중 식별이 손쉬운 몇 안 되는 것이 레바논 국기다. 한가운데 잎사귀와 줄기·뿌리까지 손으로 그린 듯 세밀하게 묘사된 녹색 삼나무 '백향목'이 있기 때문이다. 백향목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며 포도·올리브와 함께 들고 나왔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나무다. 위엄과 힘, 번영과 영원을 의미하는 레바논의 국가 상징이다.
하지만 요즘 레바논의 사정은 백향목에 깃든 의미와 거리가 멀다. 이달 초 행정부를 이끌던 사드 하리리 총리가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갑자기 사임을 선언했다. '암살될까 두렵다'는 게 이유였다. 국민은 아연실색했다. 미셸 아운 대통령이 '돌아오라'고 촉구했지만 버티다가 10여 일이 지나서야 귀국 의사를 밝혔다. 정상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레바논은 이런 나라가 아니었다. '중동의 유럽'으로 불렸다.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개방적 문화, 쪽빛 바다를 품은 풍광, 페니키아 문명의 요람이란 자부심이 있었다. '중동의 파리'라던 수도 베이루트는 두바이를 능가하는 국제도시였다. 그런데 종교 갈등과 불안한 지정학적 요건, 리더십 부재가 겹치며 지금은 '불안한 나라'의 대명사가 됐다.
기독교도와 이슬람 인구가 엇비슷한 레바논은 1943년 독립과 함께 주요 종파에 권력을 배분했다. 대통령은 기독교에서, 총리는 수니파에서, 국회의장은 시아파에서 내는 식이다. 잘 운영됐다면 화합과 공존의 모범 사례가 됐겠지만, 문제는 가혹한 지정학적 조건이었다. 군사 강국인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 끼인 레바논은 1960~1990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불똥으로 테러가 빈발했다. 2000년대 들어선 시리아 내전과 IS(이슬람국가) 사태로 난민이 몰려와 몸살을 앓았다.
최근엔 사우디와 이란의 이슬람 패권 다툼 불똥이 튀었다. 수니파 맹주 사우디가 레바논 내 시아파를 돕는 이란을 타도하기 위해 총리 사퇴를 주도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향후 이스라엘이나 서방이 본격 개입할 경우 레바논에서 신(新)십자군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독립 후 지금까지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 등 지도자 3명이 살해될 정도로 불안한 정치 상황에서 분열을 극복하고 발전을 이끌 리더십은 보이지 않았다.
레바논의 고난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가 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전개돼왔기 때문이다. 두 나라 모두 가혹한 지정학적 환경에 놓여 있고 비슷한 시기 독립했다. 강대국 패권 다툼의 틈바구니에 놓인 것도 공통된 처지다. 그들은 종교로 찢어졌고 우리는 이념으로 분열됐다. 태극기도 세계인들이 한눈에 알아보는 국기로 꼽힌다. 태극 문양과 사괘에는 평화와 우주 만물 조화의 뜻이 깃들어 있다. 지정학적 위협 요소를 극복하려는 자강 노력을 부단하게 벌이지 않는다면 태극기도 백향목을 품은 레바논 국기처럼 의미와 현실이 모순되는 국기 신세가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