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냉혹하다. 그중에서도 산골 사람들에게 가장 냉혹한 진실은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잭슨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상냥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약물중독자도 널려 있고, 아이 여덟 명을 만들 시간은 있었지만 부양할 시간은 없는 사람이 최소한 한 명 이상 있다. 잭슨의 경치는 두말할 것 없이 아름답지만, 환경 폐기물과 마을 곳곳에 널린 쓰레기가 그 아름다움을 가린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이가 푸드스탬프에 의지한 채 살아가며 땀 흘리는 노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잭슨은 블랜턴가 남자들만큼이나 모순투성이다."
JD 밴슨의 '힐빌리의 노래'에서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사회학자 조은이 쓴 '사당동 더하기 25'를 떠올렸다.(힐빌리는 미국의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가난한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이 그리는 가난과 특정한 결핍이 지독히 구체적이며, 그것이 사람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뒤바꾼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그렇다면 재개발 사업에 따른 철거 직전, 사당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곳 남자들은 건설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쉰다섯 정도만 되어도 일거리가 없기 때문에 빈둥거리게 되어 부인들의 구박 덩어리가 되고 자식들에게도 골칫거리가 된다."
라면 먹고 뛰어 800-1500-3000m 금메달을 딴 임춘애 선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1986년은 아시안게임의 해일 것이다. 내게 1986년은 KBS에서 빨강 머리 앤을 방영한 첫해였다. 조은에게 1986년은 조금 더 특별한 해였다. 무려 25년간이나 이어질 기념비적 프로젝트가 시작된 첫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당동 재개발 지역에서 만난 도시 빈민 가족들을 25년 동안 추적했다.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사당동 더하기 25'에는 한 사회학자의 집념과 고뇌가 담겨 있다. 이 책 서두에는 저자가 그곳 주민과 나눈 대화 일부가 등장하는데, 그 문장 속에서 나는 어떤 소설에서도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와 헬스장을 닫으려고 했어요, 하고 말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이렇게 영세한 경우도 세금이 많이 나와요?'라고 물었다가 '영세한 게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고 아차 했다. … 덕주씨가 김천을 가자고 해서 내가 '김천'이 뭐냐고 물었다가 '김밥천국'도 모르세요? 라며 신기해할 때와 비슷했다."
이 책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한다. 중요한 건 이것이 단지 '언어의 계급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연구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됐는데, 편집 과정에서 이 문제는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녹취를 맡은 학생들이 녹취한 가족들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가령 "지금 일자리를 잃으면 사흘은 놀아야 된다"는 자막은 첫 녹취를 푼 대학생 때문에 '3일'이 아닌 '3개월'이라고 적힌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오청(誤聽) 문제가 아니라, 삶의 경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학생들에게 실직이란 그 단위가 3개월인 데 반해, 빈곤층 청소년들에게 놀면 안 되는 날수는 단 사흘인 것이다. 사흘만 일하지 않아도 그들은 굶어야 한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한 관객은 이 다큐를 보며 왜 좀 더 절약하지 않는지 '속이 터진다'고 했다. 본인이 사는 동네에 중산층과 저소득층 임대아파트가 같이 있는데, 저소득층 아파트 주민들이 훨씬 많이 중국집 배달을 시켜 먹는다는 예를 들었다. '엄마들이 잠깐 몸을 움직여' 밥을 해 먹이면 될 텐데 하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런데 저소득층 아파트 안에 밥을 해 먹일 엄마들이 있을까? 엄마는 가출했거나 일 나갔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가난을 피상적으로 이해한다. 각자 처지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은 단지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삶의 형식이 된다. 제대로 교육하지도 못 할 거면서 아이만 많이 낳느냐는 말을 하긴 쉽지만, 피임에 대해 교육받은 적 없는 사람에게, 유산할 돈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또 아이를 낳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가난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는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25년간의 연구는 저자에게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켰을까. 그녀는 정부 보고서에 적힌 '불법 명의 자동차 발생 메커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보았을 때 와 닿지 않던 뜻이 이젠 이해된다고 고백했다. 가진 게 몸밖에 없는 궁한 사람들이 쉽게 대포폰과 대포차 주인이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불량소년'이라고 부르는 가난한 청소년 상당수가 특별히 불량하지도 악덕하지도 않은 아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그들은 돈이 없으면 즉흥적으로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뿐이라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헬스장 주인 덕주씨가 처음 경찰서를 드나들게 된 건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덕주씨는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면서 얼마 안 남았다고 피해 다녔다. 이런 일은 가난한 동네의 아이들에게는 흔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초범이 되고 재범, 3범이 쉽게 돼버린다. 덕주씨가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을 때 피해 다니면서 단 하루도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벌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래서 사회봉사를 할 수 없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사회봉사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 실제로 공소시효가 지날 때까지 덕주씨는 아무 일도 없었고 자수하라고 권한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이들에게는 나름의 '생존 전략'이라는 게 있는데 '도망 다니기'는 가장 흔하고 쉬운 생존 수단이었다."
빈곤이 재생산되는 과정과 가난의 구조를 그들 삶을 통해 이해해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이 가능해진다. 금선 할머니 가족을 비롯해 책에 등장하는 재개발 전 사당동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스포츠 복권이 터져 종잣돈 200만원으로 시작한 덕주씨의 헬스클럽은 어떻게 됐을까. 저자는 '빈곤 문화'란 없으며 빈곤이 있을 뿐이고,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가난의 구조를 이해하면 우리 사회가 조금씩 바뀔 수 있지 않겠냐는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책의 첫 장이 '밑으로부터의 사회학'이라는 건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당동 더하기 25 -조은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