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을 뒷조사한 문건을 갖고 있다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위원장인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15일 재조사위원 6명을 발표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재조사 권한 전권을 민 부장판사에게 위임한다고 밝힌 지 이틀 만이다.
그러나 재조사위원 6명 가운데 4명이 이 의혹을 처음 제기한 법관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원이고, 이 중엔 이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진 판사들도 포함돼 있어 향후 '편파 조사' 시비 등 적지 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김 대법원장은 2011~2013년 이 연구회 1·2대 회장을 지냈다.
민중기 부장판사는 이날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재조사에 대한) 여러 의견을 수렴해 위원들을 위촉했다"며 재조사위원 명단을 공개했다. 법원 안팎의 여론을 고려해 균형 잡힌 위원회 구성을 했다는 의미였다. 실제 6명 위원 중 3명은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를 강하게 요구해왔던 판사들이고 나머지 3명은 앞서 이 의혹을 조사해 사실무근으로 결론을 내린 법원 진상조사위에서 활동했던 판사들이다.
그러나 6명 위원 중 성지용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최한돈 인천지법 부장판사, 최은주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안희길 서울남부지법 판사 등 4명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다. 올 초 법원행정처 간부가 행사를 축소하라고 지시한 '대법원장 인사권' 관련 세미나를 열었던 단체가 바로 이 연구회였다. 이 논란과 관련해 이 연구회 소속 이모(39) 판사가 올 3월 법원 진상조사위에서 '행정처 컴퓨터에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하면서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새로 불거졌다. 이후 법원 진상조사위는 이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밝혔지만, 지난 6월 결성된 직급별 판사 모임인 법관대표회의는 최근까지 재조사를 계속 요구해왔다. 또 재조사 위원 중 김형률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법관대표회의 간사를 맡고 있다. 6명 위원 중 5명이 이번 의혹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온 국제인권법연구회 및 법관대표회의 소속인 것이다.
이들 5명 중 최한돈 인천지법 부장판사와 최은주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는 법관대표회의가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재조사하겠다며 자체적으로 꾸린 현안조사위원회에서 각각 위원장과 위원을 맡고 있다. 최한돈 부장판사는 지난 7월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이 법관대표회의 측의 재조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재조사 위원 중 일부는 평소 주변에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자 형사 처벌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조사위원 임명 이후 법원 주변에선 조사가 원활히 이뤄지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민중기 위원장은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이고, 위원 6명 중 4명이 이 연구회 후신(後身) 격인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라며 "위원회 구성이 편향됐다는 인식을 줄 수 있어 사건 관련자들의 얼마나 협조를 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번 재조사의 관건은 판사 뒷조사 문건이 저장돼 있다는 의혹을 받는 법원행정처 컴퓨터 속 파일을 열 수 있는지다. 다른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는 이미 지난 4월 법원 진상조사위가 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처 컴퓨터 파일을 작성한 판사의 동의가 없으면 강제로 파일을 열기 어렵다. 해당 행정처 출신 판사들은 파일 공개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인다고 한다. 이 경우 조사 자체가 겉돌 수 있다. 재조사위원 중 일부의 고발로 검찰이 이 사건에 개입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면 법원은 최악의 내홍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