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보다 말을 잘합니다. 말귀도 잘 알아듣지요. 그러다 보니 말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남 이야기, 세간의 속설, 떠도는 풍문도 잘 흡수하고 쉽게 떨치지 못합니다.

아마도 여자의 흔들리는 마음을 잠재울 수 있는 것 또한 '말'일 겁니다. 내 남자의 한마디 말. 그 말을 너무 쉽게 남발하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끝내 못 해주는 남자도 있군요. 하긴 그 말을 얼마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느냐도 사람 따라 다른 법이니….

홍여사 드림

네 아버지는 눈치가 없어. 먹통이야. 넌 아빠 닮지 마라. 어머니는 가끔 그런 푸념을 어린 저에게 늘어놓곤 하셨습니다. 아직 어렸던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그러게 우리 아빠는 왜 그렇게 엉뚱한 대답만 할까?

하지만 어른이 되어 이성과 사귀어 보니 알겠습니다. 멀쩡한 남자도 여자와의 대화에서는 바보 먹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대화에 성실하게 임할수록 더욱 그런 위험이 커진다는 것을요.

2년 정도 진지하게 사귀어 온 여자 친구가 며칠을 이유 없이 뾰로통해 있더니 어느 날 그러더군요. 오빠는 결혼을 구체적으로 고민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요.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결혼하기로 했고, 시기도 언제쯤이 좋겠다고 얘기가 된 마당이었습니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문제는 여자 친구 본인이 하루라도 뒤로 미루고 싶어 해서 보류 중이었고요. 그런데도 저에게 구체적인 생각이 없다니요.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괜히 에두르지 말고 솔직히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그랬다가는 왜 사람 무섭게 화를 내느냐고 할 테니까요. 그냥 혼자 짐작에, 집 구하는 문제나 금전적 문제를 말하는 건가 싶어 다시 한 번 제 재정 상태를 설명해주었죠.

그런데 그걸로는 여자 친구의 불만을 해소해줄 수가 없더군요. 더 궁금한 거 있으면 질문하라고 해도 뾰로통하게 말이 없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화제를 돌려, 뜬금없이 아는 언니 얘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이건 또 뭔가 싶었지만 듣다 보니 슬슬 감이 오더군요. 그녀의 '구체적인' 걱정거리는 다름 아닌 '시부모님'이었습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아는 언니는 시부모님이 경제적으로도 자꾸 부담을 주고, 지나치게 잦은 만남을 강요하셔서 결혼 생활이 위기에 놓였다더군요. 더 나쁜 것은 중간에서 커버를 해주지 못하는 남편이랍니다. 그 남편이란 사람이 결혼 전부터 두루뭉술하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이었다는 겁니다.

그런 말을 듣고 예비 신랑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요?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상식 밖의 행동을 할 분들이 아니지만, 만일 그런 행동을 하신다면 내가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겠다고요. 그랬더니 여친이 묻더군요. 어떤 행동을 취할 거냐고요. 그래서 저는 말했지요. 대화를 해보고 부모님 생각이 틀렸으면 직언하겠다고. 그래서 이해를 하시면 다시 화해 무드를 만들어가겠다고요. 그러자 여친이 재차 묻습니다. 만약 부모님 말씀이 맞는 것 같으면?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그럼 너를 타일러야지.

저의 대답이 잘못된 건가요? 여자 친구는 그날 이후 태도가 변했습니다. 전화를 며칠 잘 안 받더니 이윽고 뜨끔한 메시지를 보내더군요. 가슴이 답답하고 생각이 복잡해진다고요. 지금은 자기를 가만 놔두면 좋겠다고요. 그 의미는 너의 잘못이 뭔지 스스로 알아내라는 소리라는 걸 제가 어찌 모를까요?

그래서 정말로 고민해봤습니다.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봤습니다. 그랬더니 나오는 말이 대화에 임하는 제 마인드가 잘못됐다는 거더군요. 여자 친구와 대화할 때는 논리로 정답을 말하려 하지 말고 여자가 원하는 답을 주라는 겁니다. 결혼을 앞두고, 아직 뵙지도 못한 시부모님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더군요. 그리고 결혼 성공 여부가 그분들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생각하면 방어적인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요. 그러니 구체적이고도 확고한 약속으로 불안감을 달래주라는 겁니다.

저는 그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답을 준비해서 여친을 찾아갔죠. 우리 부모님은 생활비 같은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으신다. 다만 자식 된 도리로 양가 부모님 모두에게 최소한의 용돈은 드리고 싶다. 그리고 시부모님 만나 뵙는 건 대략 한 달에 한 번을 넘지는 않게 할 테니 누구처럼 결혼에 위기가 올 만큼 잦아지지는 않을 거다. 부모님께 전화드리는 문제든, 우리 집에 어른들을 초대하는 문제든, 모든 면에서 시집이나 처가나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자. 나도 장인·장모님께 최선을 다할 테니 너도 우리 부모님께 마음을 열고 잘해 드리길 부탁한다.

그런데 제가 준비한 답을 다 마치기도 전에 여자 친구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더군요. 결혼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잡니다. 그렇게 경직된 사고로, 결혼도 하기 전부터 사람을 옥죌 줄은 몰랐다나요? 나는 오빠랑 결혼하려는 거지 부모님이랑 결혼하는 게 아니라는 말까지….

이번엔 또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현실적인 문제는 젖혀두고 우리 둘만 생각했더니 생각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남편 역할 확실히 하겠다고 약속했더니 그걸로 부족하다고 했고, 그래서 구체적인 조항을 고민해갔더니 사람을 옥죈다고요?

돌이켜보니 요즘 들어 여친이 하는 얘기의 많은 부분이 주위의 불행한 결혼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하나같이 시부모의 횡포가 원인이더군요. 그런 얘기를 저는 솔직히 귀담아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여친에게는 그런 괴담들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남친인 저도 같이 불안해하고 방어적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솔직히 그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제가 보호해주겠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적어도 출발선에서는 낙관적인 기대를 해봐야지요. 제 말은 믿지 못하고 세간의 말들만 믿는 여친이 저는 오히려 섭섭합니다.

제 여친이 바라는 게 뭘까요? 그게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습니다. 중간에서 잘해 달라는 게 공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 달라는 건가 싶습니다. 물론 저는 여친 편입니다. 하지만 편이 되어 주는 것과 편들어주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남자가 여자에게 우리 부모님은 신경 쓸 것 없다, 여차하면 절연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거짓 맹세일 겁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거라면, 그런 말을 1%라도 진심으로 믿는다면 헛똑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 친구가 듣고 싶어 하는 말 한마디를 못 해주는 제가 더 헛똑똑이인가요?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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