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부터 '모의고사 점수는 개꿀잼 몰카였던 것임'까지
'필적확인 문구'는 고3 사이에선 '유머코드'… "감성 자극받아 시험을 망했다" "없던 힘도 생겨난다"
2018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독특한 필적확인 문구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필적확인 문구는 수험생들의 시험 부정방지를 위해 답안작성 카드란에 수험생들이 자필로 적어내야 하는 특정 문장을 말한다. 2013년 6월 고1·2 대상 모의고사에 제시된 '햇빛이 선명하게 나뭇잎을 핥고 있었다'란 문장이 온라인에서 큰 화제가 된 이후부터 필적확인 문구는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모의고사 점수는 개꿀잼 몰카였던 것임'… 독특한 필적확인 문구들
급박한 탄핵정국과 대선을 지낸 올해에는 정치 세태를 반영하는 필적확인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사설 업체 모의고사들의 문구는 학생들 사이에서 반응의 열기가 더 뜨겁다. 보안이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워 과감한 문장 제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사설업체 모의고사는 필적확인 문구로 올해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주문(主文)을 활용해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를 내놓았다. ‘1심에서 5년 2심에서 집행유예 3심에서 원심 확정… 에혀~’같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항소심 판결을 비꼬듯이 예상하는 듯한 문구도 있었다.
지난 대선 당시 화제가 됐던 대선후보들의 발언도 필적확인 문구로 활용됐다. ‘제가 갑철숩니까 안철숩니까 엠비 아바탑니까’, ‘홍준표를 찍어야 자유 대한민국 지킵니다’라는 문구는 소셜미디어상에서 화제가 됐다. 요즘 10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어투인 이른바 ‘급식체’를 활용한 ‘모의고사 점수는 개꿀잼 몰카였던 것임’이라는 문구도 온라인에서 “재밌다”는 반응을 끌어냈다.
"눈부신 초록의 노래처럼 향기처럼"… 과거에는 문학적 문구들이 강세
수험생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필적확인 문구들도 있다. 주로 시와 소설에서 발췌한 문학적 표현들이다. 지난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 제시된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는 박치성 시인의 '봄이에게'에서 발췌한 문구로 입시로 지친 전국 수험생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2013학년도 6월 고1·2 전국연합학력평가에 나온 '햇빛이 선명하게 나무를 핥고 있었다'라는 문구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문학적 수사가 뛰어나기로 이름을 알린 문장이다. 이는 아직도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며 '필적 확인계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모의고사에 자주 등장하는 필적확인 문구만을 따로 모아 시를 만들었다는 한 온라인 게시글도 눈길을 끌었다.
'꽃씨들은 흙을 뚫고 얼음을 뚫고/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연꽃 같은 팔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달빛이 밀물처럼 밀려왔구나'로 시작하는 해당 시에 수험생들은 "웬만한 문학작품 저리가라다. 정말 예쁘다"란 반응을 보였다.
학생들 사이에서 꾸준한 인기… "긴장감 풀어주는 효과도"
필적확인 문구는 모의고사를 보는 학생들에게 때로는 출제 문제 이상으로 관심을 받는다. 문학 작품 속 명문들을 따와 사용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모의고사 필적확인 문구는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화제가 된다. '필적확인 문구에 감성을 자극받아 시험 응시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곧 수능을 치룰 고3 학생들은 재미있는 필적확인 문구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수험생 김재영(18)양은 "필적확인 문구에 황당한 내용이 나와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는다"면서 "재밌는 문구가 나오면 시험이 끝난 후 친구들과 이야기 하며 웃는다"고 말했다.
필적확인 문구에 의도하지 않은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전주 제일고 고화진(18)양은 "모의고사를 치를 때 재미있는 필적확인 문구를 본 순간 웃음이 난다"며 "시험보기 전 잔뜩 긴장했다가도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같은 학교 차경희(18)양은 지난 3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으로 시행된 모의고사 필적확인 문구였던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가 가장 인상깊은 문구라고 했다. 그는 "수험생들에게 용기를 주는 내용이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필적확인 문구, 누가 만드나?
필적확인란이 수능에 등장한 건 2006년부터다. 대리시험을 막는다는 목표로 도입돼 시행된 지 10년이 넘었다. 그렇다면 필적확인 문구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뽑는 것일까.
학력평가를 주관하는 서울시교육청은 "필적확인 문구는 학력평가 출제팀 내 윤문 담당자와 국어 과목 담당 선생님들이 주관으로 19자 이내 길이로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문장을 선정한다"며 "문학작품 속 문장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고 지어내기도 한다"고 밝혔다.
필적확인 문구를 정하는 기본적인 원칙도 있었다. 우선 비문이 아닌, 주술관계가 들어맞는 문장이어야 한다. 주로 'ㅆ', 'ㄶ', 'ㄵ' 등 흘려쓰기 힘든 맞춤법이 포함돼 있는 문장을 선호한다고도 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쌍자음, 쌍받침, 겹모음이 있어 흘려쓰기 힘든 문장이어야 추후 필적확인이 필요할 때에 감별이 가능하다"면서 "이러한 원칙을 충족하는 문장을 일정 개수 이상 선정한 뒤, 논의를 통해 최종 필적확인 문구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필적확인 문구를 통해 대리시험이나 부정행위가 적발된 사례는 아직까지 없다고 한다. 서울시교육청은 "모의고사 시행 시 감독교사가 1차로, 교육청이나 평가원에 제출하기 전 2차로 담임교사가 답안을 검수하기 때문에 잘못 기재된 필적확인 문구가 채점 단계까지 올라오지 않는다"고 했다. 필적확인 문구를 잘못 쓰더라도 수능 점수에는 영향이 없다고 한다. 교육청은 "만약 필적확인 문구를 잘못 써도 채점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