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주안점은 위안부 문제이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함의가 있다. 바로 '영어 공부'다. 미 의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기 위해 영어 회화를 배우는 나옥분 할머니의 집념이 폭넓은 공감을 자아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 대부분이 영어 공부로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어서 아닐까. 한국인의 영어 공부법 변화를 시대별 베스트셀러 변천사로 살폈다.
◇'읽는 영어'에서 '말하는 영어'로
영어 학습법에도 유행이 있다. 7월 국내 출간돼 4만부 팔린 일본 영어 학습서 '영어는 3단어로'는 "원어민처럼 복잡하게 말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고 간단한 말로 의사소통에 주력하라"고 조언한다.
국내 영어 학습서 첫 베스트셀러는 1950년대 스타 강사 안현필의 '영어 실력 기초'다. 50년대 중반 출간돼 500만부 넘게 팔렸다.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줄줄 나올 때까지 암기하세요" 같은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곁들여 선생님이 옆에 붙어 있는 것 같은 효과를 주는 책. 이 밖에 '삼위일체' '영어 기초 오력일체' 등 안현필의 다른 저서들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안현필의 독주는 1967년 출간된 송성문의 '정통종합영어'(훗날 '성문종합영어')로 세대교체를 이룬다. '성문핵심영어'(1968) '성문기본영어'(1977) 등 성문 시리즈는 지금까지 1000만부 이상 판매됐다.
88올림픽은 한국인이 '읽는 영어'에서 벗어나 회화 공부에 주력하게 된 계기가 됐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올림픽을 치르고 해외여행 자유화 시대가 열리면서 그전까지는 외국인 만날 일이 없었던 사람들도 '입이 터지는 영어'를 필요로 하게 됐다"고 말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인기를 끌었던 '민병철 생활영어'는 정확한 발음에 중점을 뒀다.
◇90년대엔 학습법, 2000년대엔 토익
90년대 중반의 세계화 열풍과 맞물려 국내 영어 학습서 시장은 전기(轉機)를 맞는다. 딱딱한 참고서보다 개인의 영어 공부 체험이 담긴 에세이형 영어 학습법 안내서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 선봉에 한호림의'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가 있었다. '오리 선생'이라는 캐릭터가 영어 단어 어원을 알려주는 형식의 이 책은 1993년 출간 이래 200만부 팔렸다. 이와 함께 조화유의 '이것이 미국 영어다' 등이 선풍적 인기를 끌자 교보문고는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에 영어 학습서도 포함시킨다. 그전까지 영어 학습서는 학습 참고서로 분류돼 '책' 취급을 받지 못했다.
영어 학습법 안내서의 인기는 1999년 출간돼 200만부 팔린 정찬용의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이후 하락세를 보였다. 2001년 미국 대학이나 대학원 입학을 위한 SAT와 GRE용 단어집 '워드스마트'가 교보문고 종합 13위에 오른 이래 '해커스 토익'을 비롯한 토익 책이 거의 매년 종합 10위 안에 들며 영어 학습서 시장을 점령했다. 올해는 1월 출간돼 10만부가량 팔린 '영어 책 한 권 외워 봤니?', 4월 출간돼 5만8000부 나간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 된 비법' 등 전통적 영어 학습법 책이 주목받긴 했지만 토익 책의 기세를 누르기엔 역부족이다. '해커스 토익' 시리즈는 2005년 이래 총 22종 누적 판매량이 1100만부 넘는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 김현정씨는 "영어 학습법 책은 보통 직장인이 구입하지만 토익 책은 구매자의 80%가 20대 초반 취업 준비생"이라면서 "입사지원서용 영어 점수 올리기에 급급한 요즘 청춘의 절박함을 반영한다"고 했다.